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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요즘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GDF(Game Designer Forum)에서, Voosco 님께서 작성하신 길드워2의 기행문 "길드워즈2 플레이 이야기"를 보고, 댓글에도 남겼다시피 예전에는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게임 기행이라는 글들이 최근에는 멸종하다시피 했다는 데에서 큰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Voosco 님께서 일전에 블로그를 통해 공개하셨던 "집단 서사"에 대한 내용에도 크게 감동했던 터라, 술자리에서 게임 이야기가 나오면 꼭 한 번씩은 언급하는 내가 게이머로써 함께 플레이하기를 좋아했던 친구 녀석의 리니지1 경험담을 적어보자고 마음 먹게 됐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철권 통치와 반왕 세력 구도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유명한 바츠 해방전과도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지만, 주 포커스는 반란군이 아닌 대항하지 않는 대항 세력에 맞춰지기 때문에 바츠 전쟁과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15년이나 지난 이야기네요.

부족한 글주변이지만, 소싯적 라이트한 판타지 소설을 쓰던 기억을 떠올려 적어보았으니, 모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제 블로그의 GLOG 카테고리는 당초 아래와 같은 롤플레잉 형식의 일지처럼 써내려갈 계획이었으나,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여 일반 게임 기록 형식으로 적히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습니다.

여담 2. 지금 고장으로 휴면상태에 들어간 개인 PC의 하드 디스크에 담겨있는 단편 소설들은, 기회가 되는대로 블로그에 업로드해 보겠습니다. 중2중2한 학창 시절의 글들이므로, 크게 기대는 말아주세요.)



스토리텔러 소개

제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스토리텔러는, 저의 중고등학교 동창이자 학생 소설가였고, 지금은 직업 군인인 약 15년지기 절친이었던 친구입니다. 과거형을 사용하는 이유는 짐작하셨다시피 현재로썬 성격 차이와 같은 사소한 이유로 인해 절교를 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친구만큼 저와 죽이 잘맞게 RP(롤플레잉)하면서 게임을 했던 게이머가 없기 때문에, 게이머로서는 이 결별(?)이 조금 애석하기는 합니다. 이 친구는 와우를 할 때 블러드엘프 여자 캐릭터를 부캐로 만들어서, 오그리마 한 복판 우체통 위에 비키니 차림으로 올라가 사람들에게 럼주를 나눠주면서 이유 없는 축제를 조장한다거나, 게임하다가 재미있는 경험(주로 NPC와..)을 했다며 제게 우편으로 게임 내 편지를 쓰는 등의 재미있는 성향을 가진 게이머입니다.

제가 울티마 온라인이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알게된 것도 이 친구 덕분이고, 이 친구가 게임을 하면서 겪었던 흥분 가득한 이야기들(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것들이 바로 플레이어 네러티브) 덕분에 어쩌면 제가 지금 게임개발자가 돼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 이 친구의 온라인 게임 경험들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 울티마 온라인 수 개월 (나무꾼, 길지 않은 체험 수준)

- 리니지1 수 년 (남자 기사, 40레벨 중후반.)

- 리니지2 수 년 (클래스, 레벨 불명)

- RYL 1 년 여 (인간 어쌔신, 레벨 불명)

- 나이트 온라인 수 개월 (중반까지는 충분히 즐긴 것으로 추정)

- 와우 1년 여 (전장 풀탄력 도적, 불성 만렙)

- 작년까지 회사 분들과 아이온 플레이 (절교 시점까지의 정보)

- 디아블로 1 수 년 (배틀넷 MAX 길드 활동)

- 디아블로 2 십 여 년 (배틀넷 스탠다드/하드코어 레더 랭커)

- 디아블로 3 수 개월 (스탠다드 전클 60, 하드코어 부두술사 60 달성 후 접음)


이 중 주목해야 할 점은, 디아블로2를 10년 넘게 플레이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디아블로3를 접고 나서 이것은 디아블로가 아니라며 다시 디아블로2 배틀넷으로 복귀한 것도 참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가 들려주던 하드코어 배틀넷 플레이어들 간의 커뮤니티 이야기는, 캐릭터의 죽음이라는 강력한 시스템이 커뮤니티에 어떤 순기능을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한 좋은 연구 사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은, 스토리텔러는 게임을 재미있게 즐길 줄 알던 귀한 게이머 중 하나였다는 점입니다.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로는 이야기의 배경에 이 사실을 깔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어 미리 밝혀두는 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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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덴 왕국의 용병, K


아덴 왕국에서 기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선을 함께 넘나든 동료들과 떠나는 끝없는 모험의 길과, 섬길 주군을 찾아 그의 검으로 살다 검으로 죽는 길, 아니면 누구도 섬기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전투를 찾아 무신경하게 상대를 베어넘기고 보수를 받는 길. 아마 그 정도일 것이다. 크게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숙련 기사 중 하나였던 청년기사 K는, "냉혹한 아덴 왕국에 친구 따윈 없다"는 신념을 간직한 채 용병으로써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근처에서 싸움을 구경하다 지원을 요청하는 측에 가담하기, 초보 모험자나 보부상들의 여행길 경호같은 작고 사소한 일들에서 혈맹 대 혈맹의 싸움, 공성전 지원과 같은 굵직한 일들까지. 요청과 보수가 있는 곳이라면(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K는 그곳이 어디인지는 별로 개의치 않고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당시 주변에서 "전문적으로 용병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데 함깨 해볼 생각이 없느냐"라거나, 도움을 준 혈맹 측으로부터 "우리 혈맹에 힘을 보태줄 순 없느냐"는 종류의 여러가지 제의를 받아왔지만, "친구는 없다"는 그의 신념 아래, 그저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라는 말로 화답할 뿐이었다.

그처럼 무신경한 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 아니, 왕국 전체에 다시 없을 희대의 사건이 시작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최근 의뢰주였던 한 혈맹의 의뢰에서부터였다.



1. 철권 통치와 반왕 세력


당시 아덴 왕국의 세율은, 각 영지를 관할하는 성의 성주가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50% 이상까지 부과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지 상권을 이용하길 바라는 한 편 수익도 창출하려는 움직임 덕분에, 자유 시장 경쟁 구도처럼 적정 수준의 세율이 마을마다 적용되어 있는 것이 이상적이면서도 일반적으로 통용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강력한 혈맹의 등장으로 모든 성이 한 세력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발생했다.

정확한 천하통일의 경위까지는, K도 알지 못한다. 다만 K가 용병생활을 하면서 풍문으로 들었던 내용을 종합해볼 때, 어떤 거대한 자본을 가진 재력가가 거대 혈맹의 주축들을 은밀하게 빼돌려 자신의 혈맹으로 규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듯 하다. 시작은 어느 작은 외딴 성의 탈환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이내 몸집을 불린 뒤 파죽지세로 세 개 이상의 성을 탈환하고, 공성 시간을 겹치지 않게 조정해 양동작전, 카운터 러쉬 등의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뛰어난 전투로 결국 모든 성의 항복을 받아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모든 풍문들이 그렇듯, 얼마 만큼의 사실과 얼마 만큼의 허구가 포함됐는지 알 길은 없지만, 어찌됐든 그 혈맹이 아덴 왕국의 모든 성을 탈환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미 많은 거대 혈맹들이 성혈의 손을 잡고 그 힘과 재력을 나눠받아 상생을 꾀하고 있었고, 저항 세력이 없음을 인지한 최고 군주는 모든 성의 세율을 30% 이상까지 끌어올려버리는 강경책을 실현하게 된다. 피지배층은 막대한 세율을 감당하기 어려워 저항 조직을 소집할 능력을 잃어갔고, 지배층은 세금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며 더욱 더 강해져만 갔다.

하지만 그러한 세금 폭탄 정책은, 성의 소유권 전쟁이라는 왕국의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던 다른 많은 모험자들에게도 반감을 사게 되었고, 이에 분개한 한 모험가 연합 혈맹은 스스로를 저항군이라 부르며, 성혈에 대항하는 전쟁을 공약하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K에게 연락해 온 사람은 저항군 조직의 수뇌부였고, 좀 전에 설명한대로 직전에 K를 용병으로 고용했던 혈맹의 소속이었다. K가 고용측으로부터 들었던 설명에 따르면, 성혈은 자신들의 힘이 막대한 것을 과신한 나머지 자만에 빠져있으니, 용의 계곡과 같은 오지에서 정치에 관심없이 수련에 매진하던 많은 은둔 고수들과 K와 같은 노련한 전장의 용병들이 힘을 보태준다면, 틀림없이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저항군의 비전을 따라 상당 수의 모험가들과 용병들이 동참했고, 제법 세력을 형성했다는 판단이 들자 저항군단의 군단장은 당시 상권의 중심지였던 글루디오 영지를 탈환하기 위해, 켄트 성에 공성을 신청했다. 며칠 뒤, 마침내 공성이 시작되자, 군단장은 긴장과 흥분 속에서 침착하게 입을 열어 혈맹원들에게 개전을 선언했다.


"전원 공격!! 켄트 성을 함락한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성문에 바싹 달라붙어 악마의 단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이 만들어내는 파열음과 쉴 새 없이 시위를 당기는 요정들의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이마에 핏대가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채 전방으로 손을 휘두르는 마법사들의 굉음과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끊임없는 비명소리가 뒤엉켜 순식간에 아비규환을 만들어냈다.

전황은 군단장의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좋은 징조였다. 이 정도의 전황이라면, 마을에서부터 실어나르는 보급만 충분하다면, 승리를 점쳐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해본다. 상대방은 전성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거대 혈맹이다. 그리고 우리가 싸우는 상대는 지금 이 성 안팎에 위치한 인원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미 대비는 충분하다. 적의 후방 침투 예상 경로에 강력한 용병들로 구성된 적잖은 정예 병력들을 미리 배치시켜 두었기 때문이다. 군단장은 자신의 앞에 달려오는 수성측 기사 한 명을 베어넘기며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뭐야, 성혈이라는 것도 별 거 아니잖아?'



2. 패전, 그리고 박해


이번 전투에서 K에게 맡겨진 역할은, 보급 부대의 경호 역이었다. 이전부터 보부상 등을 경호했던 이력을 알고있기 때문이었을까. 자신보다 더 강한 힘과 체력, 그리고 무구들을 가진 다른 기사들을 제쳐두고, 굳이 K를 경호책임자로 앉힌 것은, 그를 고용했던 그 수뇌부의 어떤 깊은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보부상의 경호와 보급부대의 경호는 그 성격이 거의 동일하다. 최대한의 수송 효율을 내기 위해 자신의 무구까지도 벗은 채, 가방과 양 손까지 적재할 수 있는 최대 용량까지 물품을 우겨넣기 때문에, 경호의 대상자는 그야말로 무방비로 공격에 노출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비숙련 모험가들을 경호하는 것보다 수 배, 아니 수백 배는 더 까다로운 임무라고 한다. 적어도 그들은 제 한 몸 지켜보겠다고 몇 초 간이라도 저항할 수단이 있기 때문이라는 K의 설명이었다.

사실 K에게는 또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공성측이 여러 면에서 불리하다고 판단되던 상태였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혈맹원을 확보해야 해서 불가피하게 용병들에게는 임시혈맹증을 발급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행여라도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되면, K를 포함한 용병들은 고스란히 카오풀 상태, 즉 살인자라는 딱지가 붙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항군단 측에서는 나름의 배려 차원으로, 전방에서 공성을 이끄는 병력들은 모두 혈맹원으로 배치하고, 혈맹에 소속되지 못한 용병 들에게는 후방 경계 및 경호와 같은, 전선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보직으로 배치시켜준 것이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보수를 더 주셔야 합니다."


계약 당시 고용주에게 K는 말했다. 감수해야할 위험 요소가 너무 크다고. 물론 전장에서 쓰러져 그간 쌓아온 힘의 일부가 소실되거나 무구를 분실하는 것도 큰 위험이지만, 이번 경우처럼 살인자라는 오명이 쌓이게 되는 것도 그에 못잖은 충분한 위험임을 설명했다. 군단장은 K를 포함한 비혈맹 용병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했고, 이 일이 성사된 이후에 더 큰 보상을 주리라는 약속을 구두로 전했다.

전쟁에서 보급부대가 필요한 이유는, 전선을 이탈할 수 없는 병사들에게 물자를 보급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이유 외에도 성혈의 전략적인 방어 정책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쟁 물자를 준비해야하는 공성 측을 견재하기 위해 최고 수준으로 세율을 조정하기 때문에, 상점에서 물자를 구입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준비 방법이 아니다. 따라서 세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전시, 즉 지출 비용을 최소화 하면서, 적군인 수성측에게 자금이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그 시점에, 앞서 말한 무구까지 버려가며 물자들을 짊어질 보급 부대를 편성해, 전선으로 운송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정비를 좀 새로 해야겠군.'


글루디오 영지에서 성으로 막 출발한 보급 부대를 따라 걸으며, K는 오랜 시간 자신과 전장을 함께 해온 자신의 보호구와 낡은 검자루를 어루만졌다. 확실히 너무 예전부터 사용하던 것들이라, 비록 손에는 익을 진 몰라도 다른 용병들의 그것에 비하면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K는 연락병에게 본대에게 지금 출발한다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혈맹에 몸담고 생활해본 적이 없는 K 였지만, 예전에 공성 지원을 나갔을 때 혈맹원들 사이에서 연락을 주고받는 어떤 특별한 통신 수단이 있다는 것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 존재는 알고 있었다. 군단 소속 혈맹원의 연락병이 보급 부대에 배치된 것도, 아마 그 기능을 활용해 빠른 정보 전달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오랜 전투 경험 덕분에, K는 어느 정도 전황을 예측할 수 있는 감이 생겨난 편이었다. 아직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황이 예상대로 흘러갔다고 가정할 때, 아마 지금쯤 본대는 외성문을 파괴하는데 성공했을 것이고, 수성측에서는 준비한 어떤 수단을 사용하기에 지금이 적기일 것이다. 그리고 상대는 전성통일의 거대혈맹. K는 연락병에게 다른 질문을 던진다.


"혹시, 매복 부대로부터의 소식은?"

"예? 아. 매복조요. 음.. 네, 별 소식이 없다고 하는군요."

"고맙소."


답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가볍게 목례를 한 K는, 냉철한 눈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려본다.


'지금 타이밍에, 매복조라는 덫을 물지 않았다는 건, 저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 설마 켄트 성을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라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K는, 빠르게 주변을 경계한다. 조용하다.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다. 이맘 때 쯤이면 한 두 마리쯤 지나가던 그렘린조차 보이질 않는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 미칠듯한 정적. 이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K는 들고 있던 양손검을 강하게 고쳐잡는다. 오늘따라 하늘이 이상하게 어둡다.


"콰직-!"

"크헉!!!!"


갑자기 하늘에서 한 줄기 강력한 번개가 떨어지며, 대열의 맨 앞에 있던 보급원의 정수리에 명중했다. 대원은 즉사한 것 같다. 대열의 가장 뒤에서 병력을 인도하던 K는 재빨리 병사들에게 외쳤다.


"연락병!!! 적군이다!! 본대에 연락을!!!!!!"

"경호단은 대열을 갖추고 전투에 돌입한다!!!"



(....)



"뭐? 보급대가 공격당했다고??!!"


보급부대 연락병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받은 저항군단의 수뇌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K의 예상대로 외성문의 파괴에 성공한 저항군단은, 내성문을 방어하는 수성측 병사들과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조금씩 공성측에게 우세하게 밀리고 있었다. 이토록 기분 좋은 승리를 목전에 둔 이 시점에, 연락병으로부터의 연락은 군단측에겐 너무나 뼈아픈 소식이었다. 이 때, 또다른 연락병으로부터 긴박한 목소리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긴급!! 긴급!!! 윈다우드 방향에서 대규모의 병력 이동 감지! 목표는 켄트 성!!!"


긴급한 연락 뒤에 해당 부대로부터의 연락은 두절되었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 온 비혈맹원 전령이 전해준 소식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군단장..! 윈다우드 성주의 병력이 매복조를 몰살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 속도라면, 아마 지금쯤 외성문 밖에 도착했을 겁니다."


군단장은 목 울대를 움직여 마른 침을 힘겹게 삼겨냈다.


패전.


후방에서 외성문을 넘어 내성으로 치고 들어오는 윈다우드의 병력과, 내성문이 열리고 안에서부터 쏟아져나오는 켄트의 병력을 보며 군단장은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패전.


저들의 기만 전술에 속아넘어갔다. 고작 눈 앞의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적진 한복판에 아군 병력을 밀어넣었다. 내 잘못된 명령에 수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처음부터 저들은 진심을 다해 방어하지 않았다. 유인작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보기좋게 성공을 거뒀다.


패전.


치켜 올렸던 검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군단장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독수리 한 마리가 원호를 그리며 나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듯 내려다 보고 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자만한 쪽은 저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패전.


군단장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눈 앞에서 몰려드는 적들과 그 앞에 쓰러져가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너무 평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윈다우드와 켄트 제 1 기사단들의 칼이, 군단장의 폐부를 찔렀다.

저항군은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한 채 전멸했다. 참패였다.



(....)



마을에서 정신을 차린 저항군 무리는, 눈에 띄지 않게 흩어져 조용히 외딴 곳으로 집결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군단장이 연설을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가 자책에 가까웠기에 귀담아 들을 만큼의 의미는 갖지 못했다. 아마 성혈은 우리가 혈맹을 해체해도, 전쟁에 가담했던 인원들을 샅샅이 찾아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이려고 들 것이다. 그것이 척살이었고, 그것이 이 세계의 법도였다. 전쟁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그렇게 지워지게 된다.

K를 포함한 대다수의 용병들에게 살인자 딱지가 부여됐다. 주로 소규모 국지전을 벌였던 지원 분대 용병들에게 큰 패널티가 안겨졌고, 윈다우드의 본대와 부딪혔던 매복조들에게는 미비하거나 거의 없는 수준의 패널티만 부과됐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전자는 치열하게 전투한 덕분에 많은 적군을 쓰러뜨렸고, 후자는 압도적으로 밀렸기 떄문에 죽이기도 전에 죽어버린 병력들이 부지기수 였기 때문이다. 열심히 싸운 병사에게 더 큰 패널티라니. 이보다 지독한 모순은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정도밖에 사례할 수가 없겠소"


K는 반의 반도 되지 않는 턱없이 모자란 보수를 받아들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별 수 없었다. 의뢰를 완수해야 보수를 받는 것이 용병에게는 당연한 계산이기 때문에, 실패한 의뢰에도 보수가 지불되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위로가 된다.


"그럼, 다들 각자 건강들 하시길 바라오."


용병들의 정산이 끝난 뒤, 작별 인사를 끝으로 저항군단은 해산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죽여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K와 같은 용병들은, 어차피 보수에 따른 근로와 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성혈 측에서도 크게 제제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도 필요하면 이 용병들을 고용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K에게는 범법자라는 낙인이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다. 이 경우, 성혈들보다 오히려 일반인들의 타겟이 되기 좋기 때문이다. 상당히 잔인한 이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살인자를 살인하는 것은 무죄이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몬스터나 베어 넘기며 갱생의 길을 걸어가려던 K에게, 수많은 일반인들이 시비를 걸어왔고, 그런 시비에 마지못해 응하게 되고 그들을 쓰러뜨리면서 오히려 K의 살인 지수는 의뢰 종료 시점보다 더 높아져만 갔다.

그렇게 힘겹게 낙인자의 삶을 살아가던 K는, 예전 동료 용병으로부터 들었던 어떤 소문 하나가 문득 기억났다. 본토 지하 던전에 가면, 그와 같이 범죄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다는 소문.

K는 어차피 더 이상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고, 이미 살인 지수는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만큼 올라있던 터에, 밑질 것 없다는 심정으로 지하 던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던전으로 향하는 길에 일반인을 한 명도 마주치지 않은 것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K는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3. 땅 아래의 세계


"넌 뭐냐?"

"네?"


던전에 진입한 K에게 문지기처럼 입구에 서 있는 두 기사들 중 한 쪽의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갑작스런 질문에 반사적으로 반문하게 된 K에게 사내는 짜증스럽고 귀찮다는 듯이 다시 질문해왔다.


"뭐냐고 너는."


적절한 대답을 찾기 위해 한참을 궁리하던 K는, 최대한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핵심을 잃지 않는 문장을 만들어 입밖으로 꺼내보였다.


"카오(범죄자) 입니다만?"


"들어가."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정리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입장을 허락해 준 문지기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곤 던전 안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실수로 친구들과 방문했었던 기억을 더듬어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던 K는, 문득 이 곳이 무언가 심하게 이질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한참을 걸었지만 사람도 몬스터도 보이질 않았다. 말 그대로 텅 비어있는 지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방금 전의 그 문지기들이 인간의 출입을 통제할 순 있어도, 이 곳 내부에서 생성되는 출처 불명의 몬스터들을 통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의 어떤 법칙이 깨진 것이 아닌 이상,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챙-캉- 채챙- 파악-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서부터 금속 물체와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메아리 쳐 들려왔다. 누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강하게 이끌었다. 모퉁이를 돌아 좁은 골목에 다다르자, 앞 쪽에 작은 목재 문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힌 K를 맞이한 건, 상상 그 이상의 광경이었다.


"흐앗! 챠!"

"키에에엑-!!"


제법 큰 넓이의 방 안에는 십 수 마리는 족히 되어보이는 셀로브인지 웅골리언트인지 분간되지 않는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인 한 여성 기사가, 쉴 새 없이 그 큰 거미들에게 양손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방의 조금 더 안쪽에서는 그 여성 기사를 구경하는 서너 명으로 구성된 기사와 마법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말하는 섬을 돌아다니다가 셸로브 한 마리가 나타나면 주저없이 "축복받은 순간이동 주문서"를 사용해서 마을로 돌아오곤 했는데... 라며 잠시 상념에 젖던 K에게, 순식간에 그 많은 몬스터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여성 기사가 다가왔다.


"후... 신입이냐?"


잠시 숨을 고른 뒤 한 손으로 큰 양손검을 어깨에 둘러매고, 다른 빈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낸 여성은 K 에게 질문했다. 신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친 않았다. 아마도 이 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럼 이번엔 네가 해봐."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여성은 K가 들어온 문 쪽으로 물러났고, 본의 아니게 K는 그 여성과 구경꾼 무리의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게 되었다.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쪽을 보니, 들어온 곳 반대 방향의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구경꾼 무리의 남자 기사가 휘파람을 불더니 K에게 소리쳤다.


"휘익-♪ 잘해보라고 햇병아리 친구!"


대체 무엇을 잘해보라는 이야기인지 이해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앞 쪽의 문이 열리고, 셸로브 서너 마리를 몰고 온 한 기사가 K를 가로질러 달려갔기 때문이다

 K는 이를 악물고 양손검을 앞으로 내리쳤다.



(....)



며칠이 지나자 이 곳의 구성이 제법 익숙해졌다. 햇빛은 없었지만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기만 하면 간간히 걸려있는 랜턴 덕분에 지형을 파악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느꼈던 이질감도, 이 곳을 장악한 카오 집단이 자신들의 훈련을 목적으로 몬스터 들을 종전의 방과 같은 일부 장소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 K가 카오가 아닌 상태로 이곳에 발을 들였다면, 첫 날 마주쳤던 그 문지기 사내에게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은 정말로 문지기였다.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는 근무 방식을 가지고 있는, 오직 카오들만 머무를 수 있도록 이 던전을 유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였던 것이다.

며칠 뒤 지하 1층의 무리들과 어느정도 친분을 쌓은 K는, 층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추천에 따라 이 집단의 수령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최하층까지 내려간 끝에 겨우 마주하게 된 수령은, 처음 여성 기사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력해 보이는 십 수 마리의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촤르륵-


칼을 허공에 휘둘러 검신에 묻은 녹색 피를 바닥에 떨어뜨린 수령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K를 쳐다봤다. 호흡은 가쁜 기색 하나 없이 고른 상태였다. 당연히 이 집단의 수령 쯤 되는 사람이면,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K의 기대와는 달리, 수령은 견고한 갑주를 걸친 훤칠한 기사였다. K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용병 K, 수령을 뵙니다."

"지상의 호칭은 필요 없습니다. K 라구요? 반갑습니다. 저는 이 무리에 속한 이름 없는 기사일 뿐입니다. 수령이라는 이름은 저들이 마음대로 부르는 이름일 뿐이죠. 편하실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이제 익숙하니까요. 하하."


범죄자들의 집단을 이끌고 있는 그의 직책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쓸데없는 선입견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수령의 말투에 K는 적잖은 당황에 빠졌다.


"왕자가.. 아니시군요."

"네. 어차피 여기 이 친구들은 아시다시피 혈맹같은 구속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위치도 그저 똑같은 한 기사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저는 우두머리 같은 것도 아니고, 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제가 왕가의 피를 타고날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이겠죠."


수령은 이 곳을 성지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바깥 세계의 부조리함과 비폭력을 가장한 무자비한 위선적 폭력들로부터 순수에 가까운 이곳 친구들의 안식을 보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문지기의 존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문명이란, 결코 한 두사람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성격이기 때문에 통제라는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이후로 몇 마디의 대화가 이어졌고, K는 수령이라는 사내의 호방함게 크게 매료되었다. 그리고 몬스터 들의 피로 낙인을 씻어낼 때까지, 당분간 이 던전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다는 허가까지 받았다. K는 하루 하루 줄어가는 자신의 살인 수치가, 어쩐지 아쉽게만 느껴졌다. 이 세계에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한 적 없고 속박되기를 희망한 적 없지만, 속박하지 않는 이 던전이야말로 오히려 더더욱 강하게 그를 속박해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곳을 떠나게 된다는 것은, 아쉽지만 언젠가는 찾아올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며칠 뒤, 누군가의 방문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4. 산책


한 편, 저항군단의 반란을 무참히 짓밟아버린 성혈의 총 군주는 무료한 나날의 연속을 보내고 있었다. 세금을 올리고 내리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이미 혈맹원들 대부분이 최고 상태의 무구로 강화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질 않으니 부대유지비도 나가질 않고, 모든 성들이 자신들의 터전이기 때문에 목적 의식도 없었다.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진 절대적인 존재, 드래곤이 출몰할지도 모른다는 예언이나 루머들이 들려오곤 했지만, 당장 눈 앞에 보이지도 않는 것에 대비해야할 만큼 촉박한 상태일리도 없었다. 수 많은 모험자들의 희생 끝에 인류에게 정복된 땅 위의 많은 사냥터들은, 더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 그들에게 사냥이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땅 위의 사냥터. 땅 위의 사냥터. 땅 위.. 땅 위?"


총군주는 문득, 자신들이 가진 지상에서의 권세가 말 그대로 "지상"에만 한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업이었고, 그 조차도 거의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도달했고, 게다가 너무나도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총군주를 포함한 혈맹원 다수는 그 일상에 빠르게 지쳐가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을 한 데 모아줄 강력한 구심점, 동기가 필요했다. 더 오를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총군주는, 그 말의 허점을 알아채자마자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할 일이 생겼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

"어떤 일이십니까, 주군."

"글쎄? 따라와보면 알겠지."


병력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어떤 큰 위협적인 일도 아니었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자신을 포함한 지금의 이 구성이면 숙련자를 자칭하는 어지간한 뜨내기 모험가 무리 정도는 우습지도 않게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행선지와 목적이 궁금하다는 측근들에게, "그저 산책일 뿐"이라는 말만 전한 채 총군주는 자신을 호위하는 십여 명의 경비병과 최측근인 기사와 마법사를 이끌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어딘가로 발길을 향했다.



(....)



"주군, 이곳은?"

"그래. 우리가 아직 신경쓰지 못했던 사각지대야."


일행의 걸음이 멈춘 곳은 글루디오 영지 부근 숲 속에 위치한, 지하 던전의 입구였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마법 문양이 적힌 석조물들이 제 형태를 잃어버린 채 이곳 저곳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외딴 곳이었기 때문인지 행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총군주를 선두로 세운 일행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어두운 계단으로 한 걸음씩 내려갔다.


번쩍-

카앙-!


채 어둠에 눈이 적응되기도 전, 갑자기 어디선가 번쩍이는 불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위협적인 금속이 총군주 앞으로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올려 그것을 저지했지만, 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 전해지는 진한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총군주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경계 태세를 취했고, 경비병들과 호위 기사, 마법사들이 앞을 가로 막았다.


"이.. 이놈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분노로 경직되 오는 어깨를 애써 억누르며, 총군주가 소리쳤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그의 힘을 더욱 더 빼놓았고, 한 편으로는 신기하게도 분노를 가속화시켰다. 거대한 검 뒤의 어둠 속에서, 무신경한듯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 거 없고, 그냥 죽어라."


"이익..!! 저놈을 당장 죽여버려!!"


총군주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눈 앞의 존재에게 뛰어들은 경비병들은, 눈 깜빡 할 사이에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잠시 넋 나간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와 마법사가 동시에 사내에게 달겨들었다. 하지만 그 둘의 공격은, 또 다른 존재에 의해 순식간에 저지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호기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막 교대하러 왔는데.. 흥미진진 하구만? 나도 같이 놀자!"


공격이 저지당한 기사와 마법사가 미처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여성의 칼이 빛줄기를 남기며 둘을 지나쳐갔고,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두 사람은 차가운 지하 바닥에 널브려졌다.

처음의 사내와, 합류한 여성이 조금씩 총군주에게 다가왔다.


공포.


총군주는 처음으로 느끼는 낯 선 감정에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이 낯 선 감상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도 주지 않은 채, 굳어버린 그의 머리 위로 두 기사의 칼날이 떨어졌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움직이질 않는다.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들어올리고 싶었지만, 대신 힘겹게 입술이 열렸고 마치지 못한 외침만 지하의 어둠 속에 잡아먹히고 만다.


"나는... 내가 바로 ㅇ....!!!!!!"


총군주는 어둠 속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고, 자신의 뺨에 닿는 차갑고 거친 바닥의 감촉을 느낄 틈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



5. 일곱 밤의 혈투


"주군! 정신이 드십니까!!"


총군주는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내가 쓰러졌었구나. 영원한 죽음이 없는 세계였지만, 죽음이라는 것의 공포는 똑똑히 새겨졌다. 자신의 몸을 이리 저리 살피던 총군주는, 자신의 힘이 제법 약해졌음을 느꼈다. 죽음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혈맹의 간부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고, 자신은 왕성의 침실에 누워있었다. 죽음에 대한 낯 선 공포가 지나가자, 그 자리를 휘몰아치는 분노가 채워올라왔다. 부하들의 도움으로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자리에 앉은 총군주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간부들에게 선포했다.


"전쟁이다. 이 빌어먹을 지하 범죄자 무리를 세상에서 지워버리자!!!"



(....)



"뭐? 경비병을 대동한 군주였다고?"


K는 교대를 마치고 돌아온 혼성 문지기 조에게 놀란 눈으로 소리쳐 물었다.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그래 경비병을 데리고 나타난 군주였다고. 그게 왜?"


"그게 경비병인 게 확실해?"


"당연하지! 흔하지 않은 복장인데다가, 이래뵈도 왕년에 공성전에 참가했던 몸이라, 성벽 위에서 활 시위 당기던 그 놈들 복장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니까."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어쩐지 으시대는 듯한 말투의 여성 기사에게, K가 되물었다.


"너 설마.. 군주라고 아무나 다 경비병을 대동할 수 있는 줄 아는 건 아니겠지?"


"뭐? 다 되는 게 아니었어?"


"이런 멍청한..! 아니다. 됐고, 나랑 같이 수령한테 좀 가자."


"아, 왜? 나 피곤하다고! 자러 갈 거란 말이야!"


"잔말 말고 따라와."


K는 여성의 투덜거림을 귓등으로 튕겨내면서, 손목을 낚아채 최하층으로 잡아 끌었다. K는 오랜만에 맛보는 긴장감에 반가움을 느끼면서, 빠르게 생각을 되짚어본다. 경비병의 수는 짐작할 수 없지만, 경비병을 대동한 군주라는 건 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이 곳에 오기 전의 상황과 가늠할 순 없지만 대략적으로 지나간 시간을 계산해볼 때, 저들은 아직 단일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제껏 한 번도 관심두지 않았던 이곳을 찾았다는 것은, 너무 여러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제공했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의 조각을 미처 다 맞추기도 전에, 둘은 수령의 처소에 도착했다.


"음.. 성가신 일이네... 알려줘서 고맙군요 K."


"신세 지는 입장에서, 당연한 도리였을 뿐입니다."


K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수령은 고개를 갸웃거려 보이더니, 팔짱을 풀지 않은 채 턱을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K의 말을 정리해보면, 오늘 우리 근무 조가 처리한 사람이 땅 위의 성주라는 거고, 그 성주라는 사람, 아니 사람들의 세력이 거대해 대항할 세력이 없어 이 곳을 넘보기 시작했는데, 보복이라는 명분이 생겼으니 조만간 크게 들이닥칠 것이다.. 라는 건가요?"


"네. 현재로썬 저도 확답을 드리긴 어렵지만, 결과적으론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럼 적당히 준비하라고 전할게요."


"네, 그럼..."


K의 목례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수령은, 곧바로 주변의 인원들에게 방금의 내용을 전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모습을 뒤로한 채 방을 나서며, K는 머릿 속으로 이 곳을 찾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우했던 상대방의 무력을 상기해본다. 아직 최고 수준에는 턱없이 모자란 자신의 실력으로는, 그들의 전면전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이 예고된 위험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에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지금으로썬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수령의 침착한 대응을, 그저 묵묵히 믿고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K의 예견대로 아니, 적어도 수 일은 걸릴 거라던 예상보다도 훨씬 이른 시점에 그들이 다시 찾아왔다.


"미개하고 오만한 지저인들은, 당장 나와 아덴의 지배자 앞에 무릎을 꿇어라!"

"무지로 인한 과오는 용서해주겠다.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라!"

"순순히 협정을 체결한다면, 지상의 권세를 약속하겠다!"


제법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문 밖에서 시끄럽게 구는 통에, 야간 근무조의 신경은 몹시 곤두서 있었다. 던전의 인원들에겐 온갖 협박과 감언이설로 점철된 혈맹 측의 도발문구에 동화되는 기색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저 잠자리에 귓가에 앵앵거리는 모기에게 느끼는 신경질에 가까운 반응만 간헐적으로 드러날 따름이다.


"정말...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수령?"


"그럼요. 평시의 두 배나 증강했으니 충분하지요."


던전 입구에 배치된 네 명의 문지기 인력을 보며 물어오는 의구심 가득한 K의 질문에, 수령은 덤덤한 어투로 답변했다. K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과 어제 처치한 성주의 존재를 감안할 때,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성에서 병력을 대동한 것으로 짐작해본다. 누구였을까 어제의 그 성주는. 이런 곳에서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할 정도라면, 변방의 어느 힘없는 성주였을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그럼 다들 잘 부탁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큰 소리로 알려주세요."


수령은 네 명의 문지기들에게 싱긋 웃어보이며 목례한 뒤, 가벼운 걸음으로 뒤돌아 내려갔다. K는 수령을 따라갈 지, 이곳에 남아 만일을 대비해야할 지 잠시 고민해 본 뒤, 일단은 입구 조금 뒷 켠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어둠. 지금은 눈에 익어 괜찮지만 일출 이후의 야외에서 이곳으로 들어온다면 어둠에 적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계단. 좁고 긴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적들은, 그 앞에 빈 틈 없이 서있는 네 명의 문지기들에게 한 명 씩 공격받게 될 것이다. 좁고 긴 이 통로가 지리적으로 아주 큰 역할을 해줄 것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병사라 한 들, 어둠 속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네 개의 검을 버텨내기란 불가능에 가깝겠지. 여러모로 수비하기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저들의 실력에는 한 점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저들도 사람이기에 결국 언젠가는 지칠 것이고,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는 순간이 온다면 수많은 혈맹의 병사들이 던전 안으로 몰려들어와 온통 헤집어 놓을 것이다. 그 뒤에는.. 저 간악한 혈맹 무리가 이 곳의 순수를 짓밟고 일어서 마침내 아덴 왕국의 모든 곳을 지배하게 되겠지.

K는 부정한 생각이 겉잡을 수 없이 번지자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그 때 바깥쪽에서 함성과 소 떼가 달려가는 듯한 굉음이 들렸고, 문지기들은 계단을 주시하며 말없이 검 손잡이를 강하게 고쳐쥐었다. 근무조의 기사 한 명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엷은 웃음을 띠운 채 말했다.


"온다."



(....)



"주군..... 서.... 선봉부대가 전멸했습니다."


"뭐? 뛰어 들어간 병력이 얼만데 고작 몇 시간 만에 전멸이라고? 그리고 네 녀석은 근성도 없이 벌써부터 실패를 보고하는 건가? 앙?"


"아.. 아닙니다! 주군의 명을 받들어 선봉 부대원들이 몇 번이나 거듭해서 쓰러져가면서 공격을 계속하고 있지만.... 면목없게도 돌파 기미가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합니다 주군! 아군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더 이상의 진격은 무의미합니다. 부디 철수 명령을 허락해 주십시오!"


혈맹의 총군주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지금 이들이 내게 거짓 증언을 하는 이유를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눈빛과 목소리는 진실됐고, 무엇보다 이들이 거짓을 말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총군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철수를 허가했다.


"이제, 마법사 부대를 투입해."



(....)



K는 방금까지 눈 앞에서 벌어난 일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밀려들어오는 적들을 맞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무심한듯이 하나씩 베어 넘기는 근무조의 최소화된 움직임을 보면서, 아군임에도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비록 어둠과 병목 구간이라는 공간 상의 우위가 있다곤 했지만, 방금의 모습대로라면 개활지에서 마주쳐도 불리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리할 것만 같았다. 그들로 인해 이 던전 전체가 전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짐작할 수조차 없는 강함이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이 전투에서 패배하는 쪽이 이 쪽은 아닐 것만 같았다. 괜찮냐는 질문도 필요치 않아 보이는 그들을 보며, K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폈다. 긴장을 풀기 위한 그 만의 방법이었다.

좀 전의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지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는 그들은, 키득거리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때 윗 켠에서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시 오는 건가."


쿠르르르르르릉!!!!!

챙강-!


지하 전체에 귀가 터져버릴 것 같은 굉음이 울려퍼지면서 계단 위로부터 갈라진 땅덩어리(바위도 흙도 아닌, 말 그대로 땅덩어리로 밖에 볼 수 없는 물체)가 쏟아져 내렸다. K는 숙련된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어떤 마법 주문들 중에 방금 전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는지 더듬어본다. 익숙했다. 강한 파괴력에 비해 사용이 까다롭지 않은 탓에 많은 마법의 길을 걷는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그 주문. 대지를 가르는 굉음.


"이럽션!"


흙더미를 칼로 막아낸 충격으로 인해 저린 손목을 주무르던 근무조들이 뒤에서 터져나온 K의 외침에 반응했다. 마법사. 성가신 존재. 저마다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여전히 동요하고 있지 않았다. 네 명 중 가장 이곳에 오래 머문 것으로 추정되는 기사가 K에게 말했다.


"소란스럽지 않게, 마법사가 왔다고 수령에게 전해줘."


K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빠르고 조용하게 수령의 처소로 향했다. 마법사. 기사. 마법사와 기사. 서로에게 상극이다. 어느 한 쪽의 유리를 점칠 수 없는 그런 관계. 직전에 몰려든 기사 대 기사의 싸움에서는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그리고 압도적인 강함의 우위에 있는 아군의 압승이 예견된 일이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쪽에서는 어둠, 그리고 병목이 무기였다면 반대로 빛, 그리고 긴 통로가 상대방의 무기로 변할 수 있다.

양날의 검.

K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정신 없이 걸어가고 있었고, 알 수 없는 턱의 통증에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어금니를 너무 세게 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이 너무 많다. 항상 그랬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검을 뽑아드는데 망설임이 있다. 오랜 시간의 용병 생활로 무뎌졌다고 믿었지만, 무뎌진 것은 오히려 자신 쪽이었다. 망설이고 있다는 것에 무뎌졌다. 생각과 망설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생각. 생각. 없앨 수 없다면, 다른 쪽으로 이용해보리라고 마음먹었지만, 아직까지 적절한 대응책을 발견하진 못했다. 어쩌면 K에게, 기사라는 직업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도움을 받았군요. 저희도 수비를 보강하겠습니다."


K에게 마법사의 진입 소식을 전해들은 수령은, 근처의 인원들에게 요정들과 마법사 몇을 입구로 지원해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이번에도 턱없이 모자라보이는 대책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알 수 없는 신뢰감에 또다시 묵인하고 말았다. 입구로 달려가는 서너명의 요정과 마찬가지 규모의 마법사를 보면서 K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누구도 묻지 않았던 이 사태에 대한 일말의 책임 의식과도 같은 기분을, K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책.

그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정.

만약 그랬다면, 지금 이 곳의 사람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일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 채, 자신들만의 성역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

망설임.

K는 이런 순간마다 생각이 많아지는 자신이 스스로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몸에 베어버린 습관은, 그렇게 간단하게 바뀌어주지 않는다.


푸슈슛-!


입구에 다다를 즈음,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로 요정들의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요정들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다고 했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지만, 실제로 보니 여전히 놀라웠다. 뒤 이어 화살에 맞은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이내 다른 소음들에 지워지고 말았다.

도착한 일행을 맞이한 건, 무수한 적군 기사, 마법사들의 시체와 땀과 피로 범벅이 된 모습의 문지기들이었다. 다행히 아직 쓰러지진 않았지만, 저 상태라면 필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단 네 명의 힘으로 이만큼이나 지켜냈다는 게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평소에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 퍽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이 곳에 온 뒤로는 일상처럼 쓰여 이제 익숙해지게 된 것 같다.

지원 온 요정 중 한 명이 근무조들에게 고생했다며 철수를 권유했지만, 그들은 부득불 만류하고 잔류하기를 원했다. 그저 회복물약 몇 병만을 건네 받은 채...

그 뒤로 수 차례 더 돌파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원거리 지원 병력 덕분에 이전보다 손쉽게 막아내었고, 혈맹측은 꼬박 하루 동안 입구조차 돌파하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희생된 사기 꺾인 병력을 이끌고 철수하고 말았다.


개전 2일 째인 다음 날 동틀 무렵, 혈맹의 총군주는 자신의 주력 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운 혈맹 최정예 부대를 신속하게 투입시켰다. 좁은 입구만 통과한다면 수적으로 우세한 자신들에게 승리가 보증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값비싼 희생을 지불한 덕분에, 저들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아차린 것은 혈맹 측이 건진 그나마의 소득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경비가 약해진 시간을 노린 덕분에 얻은, 드디어 입구를 돌파했다는 뜻깊은 소식이 말이다. 승리를 거머쥔 듯한 희열에 찬 총군주는, 자신의 측근들과 경비병을 대동해 직접 참전하기로 한다.



(....)



"뭣들 하는거야!! 도망치는 저 새빨간 범죄자 놈들을 쫓아가지 않고!!"


총군주의 앙칼진 고함 소리가 던전 지하 2층 안에 쩌렁쩌렁 울려펴졌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인 덕분에 총군주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2층 입구의 탈환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그리고 그가 도착하고 십 수분 만에 2층 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역시 그 망할 계단이 문제였어. 총군주는 병목만 지나가면 돌파할 수 있다던 자신의 예견이 맞아 떨어지자 벅찬 기쁨에 몸서리가 쳐졌다. 이제 이 건방진 살인자 집단을 소탕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지형에 익숙하지 않던 혈맹의 병사들과 달리 카오들은 제 집 드나들듯(사실 제 집과 진배 없지만) 병사들의 사정거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약올리는 듯한 그들의 움직임이 혈맹 진영은 분노를 자극한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바보같은 카오 무리는 어떤 방 안에 보여든 것 같았다. 포위망을 좁혀오던 혈맹은 방문을 걷어차 거칠게 열어제낀다.


취익-! 취이익-!


사람의 것이 아닌 괴성이 들려왔다. 방이 너무 넓어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괴성의 주인, 아니 주인"들"이 시계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마... 맙소사!! 거미 무리다!!"


파랗게 질려버려 뒤로 도망치는 혈맹원들의 등 뒤로, 셸로브와 웅골리언트의 긴 다리가 창처럼 뻗어져 나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나가는 선두 그룹의 뒤에서, 마찬가지로 공포에 질렸지만 그래도 생각할 겨를이 있던 후속 부대가 몬스터들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존재들의 습격에, 게다가 너무나 많은 숫자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병력 손실이 너무 컸다. 총군주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카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침착해! 고작 거미 따위에게 쓰러질 셈이냐!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거냐!"


총군주의 고막을 찌르는 외침 덕분에 병사들의 혼란은 조금씩 잦아들었고, 일행을 덮진 한 무더기의 몬스터는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하지만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해도 저문지 오래라 더 이상의 진군은 어렵다고 판단되기에 이르렀다. 혈맹은 소규모의 병력만을 현재 거점에 주둔시키기로 결정한 뒤, 다음 날 재정비해 진군하기로 했다.

하지만 주력 부대가 철수하자마자 주둔 병력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총군주는 목에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듯이 소리치며 던전 방향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 빌어먹을 병목 구간을, 처음부터 다시 돌파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



"여러모로 큰 도움을 받네요 K. 정말 감사합니다. 이 지형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과찬이십니다."


K는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과 망설임의 가치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타인을 위한 의미있는 도움. 보수가 아닌 또다른 목적의 존재를 어렴풋이 깨달은 기분이 들었지만, 감상에 사로잡힐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저들이 후문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대비는 해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마찬가지로 병력을 충원하도록 부탁해 두겠습니다."


"네, 그럼."


K는 아주 오래 전 친구들과 말하는 섬의 던전을 탐험하던 중,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기나 긴 길을 발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알 수 없는 공포로 인해 멀리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본토로 넘어오고 나서 들은 풍문에 의하면 그들이 발견했던 것이 해저 터널이라는 것이었다. 말하는 섬과 글루디오 영지 아래의 이 곳 던전까지, 바닷속으로 연결된 긴 통로가 있는 셈이다. 아마 저들에게 해저 터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내일부터는 후방에서의 침입도 염두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K의 예상은 보기좋게 맞아떨어졌고, 개전 3일 째엔 오히려 적 병력이 정문과 해저 터널의 양쪽으로 분산된 덕분에 좀 더 수월한 방어가 이뤄졌다. 하지만 장기전이 된다면 안전하진 않을 것이다. 관리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곳은 엄밀히 몬스터의 영역이고, 게다가 보급도 최하층에 위치한 단 한 명의 상인에게 의존해야했기 때문이다. 공성의 기본은 공성측의 수적 우세이지만, 전략적으로는 장기적으로 수성측을 고립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스스로 고립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이 전쟁이 장기화되면 분명히 무너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K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고, 카오들은 너무도 잘 싸워줬다. 전면전의 화력은 물론이거니와 적절한 유인, 엄폐, 후방침투 및 교란 등과 같은 다양한 K의 전술 요청을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이 싸움은 6일 째의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개전 7 일 째. 며칠 전부터 카오 측에서도 희생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격차가 무너져가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피해는 수성측에게 너무나 불리했다. 재정비가 불가능한 것이다. 비록 압도적인 전력 덕분에 수 일간을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했지만, 물자를 확보할 곳이 없는 카오측과는 달리, 땅 위의 모든 세금이라는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혈맹 측의 보급은 마를 줄 몰랐기 때문이다. 누적된 피해는 혈맹 측이 컸지만, 복구 능력에서 차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버틸 힘은 남아있다. 수령도 최소한 한달 동안은 사투를 벌일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K도 마찬가지였다.


"퇴각! 퇴각! 최하층에서 다시 집결!"


아군의 피해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자, 수령과 K는 최하층에서 다시 정비하고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싸움이 벌어지는 영역이 넓을 수록, 수적으로 열세인 카오 진영에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 층의 입구에 모든 병력이 모여있던 카오 진영에는, 그들의 침 삼키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어서 와라. 우리는 이 곳에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순순히 내어 주지는 않겠다. 우리 동료의 목숨 하나가 사라질 때, 네 놈들의 목숨 백 개를 가져갈 것이다. 수령은 두 손으로 손잡이를 고쳐잡으며, 옅은 미소를 비춘다.



(....)



쿠르르르릉....


진동. 그리고 천정에서 부스스 떨어지는 돌조각들. 핼명의 총군주는 위층이 소란스럽다고 생각했다.


"주군!! 후방에서의 공격입니다!!"


다급히 계단을 내려온 연락병의 말은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분명 카오들은 이 아래 최하층에 모두 몰아넣었을 터였다. 확신할 수 있었던 건, 혈맹 측에서도 저들의 후문인 해저터널을 반대편에서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놈들이 도주하려고 했다면, 그곳에서 몰살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방에서의 공격은 너무나 뜻 밖이었다. 카오들이 대낮에 버젓이 땅 위를 활보하는 일은, 그것도 무리 지어 활동한다는 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연락병의 심장에서 차가운 검신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찔러 넣었던 칼을 뽑아든 연락병 뒤에 있던 존재가 총군주의 눈에 들어왔다. 총군주는 그 자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까. 그에 대한 소문이라면 들어봤지만, 최근에는 그 소문조차 잊혀질 정도로 자취를 감추었던 자의 모습을 보며 총군주는 소리쳐 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나를 모른다니 애석하군. 하지만 그 뒤의 친구는 아마 날 알고 있을게요. 그 친구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네... 네 놈은 설마...?"


자신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켄트의 성주에게, 전 반란군단의 군단장이었던 사내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6. 계약


갑작스러운 전 반란군단의 개입에 혈맹 진영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것은 너무나 뜻 밖이었고 지휘부가 손 쓸 틈도 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K의 신호와 함께 역으로 치고 올라온 카오 집단과, 위에서 밀려내려오는 반란군단의 양동 작전에 거대한 혈맹 진영은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잔당을 모두 소탕한 뒤에 K는 반가운 얼굴로 군단장에게 악수를 건넸다.


"정말 반갑습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강하게 손을 움켜쥔 뒤, 군단장은 K의 뒤에 서있던 수령에게 말을 건넸다.


"그쪽이 혹시 이곳의 수령이라 불리는 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모두들 저를 그렇게 부르고 있지요."


군단장은 수령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고, 수령은 한결 같은 가벼운 목례로 화답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K의 질문에 군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정리된 상황을 설명했다. 처음 총군주가 이 곳에서 살해당했을 때, 마을 곳곳에 소문이 번졌지만 누구도 쉽게 믿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도 당연할 것이, 저 대혈맹의 성주, 그것도 총군주가 던전에서 일개 카오 무리에게 쓰러질 거라곤 누구도 납득할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의 최측근은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기사와 마법사와 요정이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상대가 그들을 쓰러뜨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튿날인 개전 첫 날. 혈맹의 병력들이 던전에 소집해 전쟁중이라는 소식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그리고 지하에 있는 카오들에 대한 존재는 범죄 이력이 있어 그곳을 거쳐간 경험이 있는 자들에 의해 암암리에 번져갔고, 결국 카오 집단과 혈맹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고 한다. 즈음하여 군단장도 이 소식을 접했지만, 혈맹도 아닌 범죄자 집단에게 그들에게 대항할만한 힘과 명분, 그리고 무엇보다 결속력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음을 이야기하며 수령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수령은 호탕하게 웃어넘기며, 보시다시피 그 말씀은 맞는 말이라고 대답해 군단장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루, 길어야 이틀이면 끝날 줄로만 알았던 이 전쟁이 장기화 될 기미가 보이자, 군단장은 상황을 주시하며 다시 없을 기회를 거머쥘 준비를 했다고 한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지독한 패배를 맛봤던 동료와 용병들은 그들에게 대항하기를 거부했다. 공포와 패배감이 뿌리깊이 자리잡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며칠 째 계속되는 이 곳의 소식을 전해주자 조금씩 마음을 열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이전의 공성 시기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병력이 집결되자, 혈맹의 후방에서부터 공격해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복수에 성공했다.


한바탕 피바람이 지나간 던전의 입구.

분노와 모욕감에 치를 떨던 혈맹의 총군주는, 군단장과 수령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다. 그의 앞에는 두 장의 서면이 놓여 있었다. 그 서면 중 한 장은 던전에 대한 불가침조항이 적힌 수령의 글씨가, 나머지 한 장에는 세율 동결에 대한 내용이 적힌 군단장의 글씨가 적혀있다.

총군주는 한참동안 충혈된 눈으로 종이와 앞의 두 사내를 번갈아보다가, 품에서 자신의 인장을 꺼내 양 쪽에 적힌 자신의 이름 옆에 날인했다.


자신들이 집권하는 동안에는 두 번 다시 던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며, 세율을 최하 수준으로 동결하겠다는 약속을 마친 총군주는 분노와 의심의 눈초리를 수령에게 보내며 힘겹게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이 약속 뒤에.. 내가 얻는 것은 뭐지...?"


들릴 듯 말 듯한 총군주의 마른 목소리와 대비되는 청량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수령이 대답했다.


"땅 위의 권세. 그것을 보장하죠. 어차피 우리는 관심 없으니까."


힘들게 고개를 끄덕인 총군주는, 최강이라고 불리던 측근들의 부축을 받은 채 초라하게 계단을 올라 던전을 벗어났다. 수령의 마지막 말에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을 보며, 군주는 끝없는 패배감을 맛보고 있었다.



- Fin. -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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