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플레이하고 있는 와우나 이브의 길드/콥과 같은 커뮤니티에는 어느정도 연세 있으신 중년무렵의 형님들이 포진하고 계신다.
그중 와우의 길드원 중에는 올해 큰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50대의 큰형님이 계신데, 오늘 마침 큰형님이 꼭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아이템이 있어, 던젼에 같이 갈 길드원들을 모집하고 계셨다.
한가롭게 업적질이나 하고 있는 필자는 흔쾌히 '저 손이요'하고 손을 번쩍 들었으나, 이미 그 채팅을 입력하기도 전에 큰형님이 필자를 납치(파티초대)하셨다. 그리곤 최근 패치된 던전 즉석입장 시스템을 이용해 길드원끼리 5인이 모여 손쉽게 던전에 입장할 수 있었다.
한창 몬스터들을 쓰러뜨려가며 진행하던 도중, 어떤 네임드 몬스터가 떨어뜨린 아이템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의 최신 나이프"
직역인지 의역인지 모르겠지만, 아이템 접두어에 아저씨라니.. 게다가 첨단 유행... 웃음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필자는 득달같이 파티원들에게 농을 쳤다.
"이거 집는 사람은 아저씨!ㅋㅋ"
당시에는 별 반응이 없었고 필자는 단지 본인의 개그력이 부족함을 탓할 뿐이었다. 쳇, 재미가 없었나보군.
그리고 모든 인원들이 주사위를 던진 끝에, 31세의 한 파티원이 해당 아이템을 습득하게 되었고, 필자는 다시
"이제 형님도 아저씨 입성! ㅋㅋ"
라는 메시지를 입력했다.
그러자 주위 반응이 갑자기 냉담해지며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슨,
"여기 큰형님도 계신데, 나이 얘기는 좀.... ^^;;"
그자리에서는 일단 죄송하다며 사과를 드렸지만, 곰곰히 생각해봐도 뭔가 이상했다.
우선, 필자는 단 한번도 큰형님을 아저씨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필자가 생각하는 멋지게 나이드는 방법 중 하나인,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젊은 기분으로 같은 게임을 즐기며 늙어가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미 큰형님의 마음은 청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20대 중후반의 필자도 아저씨 호칭에 거부감이 없는데(이미 PC방 알바하던 20대 초반에 초중고딩들에게 아저씨라는 호칭은 익숙하게 당하기도 했지만) 50대에 큰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큰형님이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 과연 기분이 나쁘실까?
그렇다면, 정작 아저씨 당사자인 큰형님 본인은 별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괜히 쉬쉬하고 있으면, 그것이 더 기분나쁜 것이 아닐까? 그들이야말로 큰형님을 "아.저.씨."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마치 얼굴이 곰보인 아저씨에게 곰보빵을 달라고 하지 못하고, 대머리 아저씨가 가발이 돌아갔는데 차마 가발이 돌아갔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쩔줄 모르고 쉬쉬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라는 상황이라고 해석을 했다면, 설사 웃자고 한 아저씨 발언에 나이 지긋하신 큰형님이 심기 불편하시기라도 하실거라는 말인가? 그럼 그렇게 생각한 다른분들이야말로 큰형님의 인격을 깎아 내리고 있는게 아닌가?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좀 더 살아보면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심을 보여줄 수 없고, 예의라는 이름의 위선으로 엮여있는 '사회생활'이라는 노동은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매순간 벅찬 일인 것 같다.
< 드래곤라자 양장본 8권 + 그림자 자국 이미지. 필자는 아직 그림자 자국은 구매하지 않았다.
사진은 네이버 불펌.. >
드래곤라자Dragon Raja.
이영도씨의 장편 판타지 소설이자, 본인을 환상문학에 처음으로 입문하게 만든 작품 되시겠다.
당시 중학교 1~2학년 쯤이었을 듯한데, 친구 집에서 눈보라Blizzard사의 워크래프트WarCraft 2를
그게 무슨 게임인지도 모르고 넋을 놓고 구경하고나서 막연하게 머릿속에 자리잡았던 판타지 세계. (나중에야 판타지Fantasy로 분류되는 하나의 장르가 확립되고나서 어린시절 사촌형들이 패미컴으로
즐기던 드래곤퀘스트 류가 모두 이 장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쨋든, "처음으로 접했던 작품이라서" 라기보다, 운이 좋았던건지 처음부터 "제대로 된 작품"을
손에 잡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유피넬(질서의 신. 질서 그 자체를 의미)과 헬카네스(혼돈의 신.
또는 혼돈)로 시작하는 나름의 신학체계(물론 작품의 화자가 17세 소년이라는 설정이므로 깊이있게
다루지는 않는다.)와 마력은 한곳에 집중되기를 거부한다는 나름의 마력체계(이 역시 깊이있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실제 무사가 아닌 다음에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나름의
검술체계까지. 그야말로 일반독자의 수준에서 보았을 때 꽤나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판타지라는 장르를 빌어 유쾌하고 읽기 쉽게 풀어낸,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끊임없이 던져주는
'씹어볼수록 재미있는' 책이다.
현실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적당히 부패한, 적당히 명예로운 사회와 '인간이 아닌 종족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사회관 역시 작품의 주된 주제인 '관계'를 위해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세워져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라자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볼까?
'나는 단수가 아니다'
이 말은 바이서스 건국공신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유명한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 애인의 남자으로써의 나, 내 부모의 자식으로써의 나, 내 친구들의 친구로써의
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써의 나 이런 여러가지 "나 들"이 모여서 하나의 '나'로 불린다는 얘기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하나지만, '나'라는 '의미'는 '단수가 아닌' 것이라는 이야기.
나의 실존을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존재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
타인에게 투영된 자신의 모습이 기억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한다면, 과연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실제로 '영원의 숲'에서 이러한 '나 들'을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이야기는
관계와의 단절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주는 라자식의 단적인 예가 아닐까.
'너'와 '너의 무엇'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말은 대미궁에 잠든 드래곤로드가 일행들 하나하나에게 던진 질문의 공통 주제이다.
'자네를 살려주고 대신 자네의 마을을 파괴하겠다. 아니면 마을을 파괴하지 않는 대신 자네를
죽이겠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성직자, 자네의 신은 자네가 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네가 살면 동료들은 모두 죽을 것이고,
자네가 죽으면 동료들은 모두 살 것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일행은 모두 자신이 아닌 자신의 무엇을 선택했다. 여기서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이거 너무 착한 소설인건가?? 왜 주인공들이 바보처럼 느껴지지?
나름의 이유는, 작가는 위에서 말한 '나는 단수가 아니기 때문'으로 풀어나가려고 했다.
나의 몸뚱이는 살아서 나가겠지만, 동료를 팔아 얻은 생명이라는 죄의식은 그렇다쳐도
나라가 없어져버리면, '국민으로써의 나'도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온전한 나로 살 수
없는 것이다.............라고는 하는데....
그래도 과연, 실제 상황에서 저런 선택을 하게 되면, 과연 이타심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을까?
작가는 '드래곤은 홀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했다.
주인공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비단 본인뿐만이 아니라면, 요즘의 우리들은 개인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드래곤처럼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인간과 드래곤의 연결고리 '드래곤라자'
한때 대륙을 지배하던 드래곤 중의 드래곤인 드래곤로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할슈타일 가문에게
인간과 드래곤을 연결지을 수 있는 '드래곤라자의 혈통'을 100년 동안 약속한다.
본래 드래곤은 인간과 달리 스스로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존재와 관계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라자'라는 존재로 인해, 드래곤과 드래곤라자 양자간의 계약을 통해 드래곤라자를 받아들인
드래곤은 인간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드래곤라자는 직접적으로 통역을 한다거나 하는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는다. 단지 상징적인 위치일
뿐이다. 드래곤이 드래곤라자와 서로 교감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라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인간의
'관계' 안에 잠시나마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드래곤은 완전한 존재다. 따라서 다른 지성체와 교감할 필요가 없다.
드래곤은 수명이 대단히 길다. 따라서 자신의 수명만큼 자신의 존재가 지속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따라서 다른 지성체와의 교감을 통해 완전에 가깝도록 변화해야한다.
인간은 수명이 대단히 짧다. 따라서 짧은 수명 동안 다른 사람에게 수많은 자신을 심어두어야 한다.
다른 이들의 안에 심어둔 자신이 몇 세기가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만큼 존재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인간은 기록의 종족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망각의 축복을 받은 것은 오직 인간.)
완전한 존재와 불완전한 존재의 연결.
이 부분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주제가 됨과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끝없는 고민의 나락을
경험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쓴웃음)
작품을 다시 읽는 요즘을 보고 있자면, 더이상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人間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다. 각자가 각자의 부속품으로써의 역할만 충실히 하고 있을 뿐, 진짜 커뮤니티를
구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작품 속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는 일들이, 어째서 이리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걸까..?
이영도씨의 다른 글들은 아직 많이 접해보지 않았지만,
(폴라리스 랩소디의 만연체에 거부감이 심하게 들어 그 이후의 작품들도 읽지 않고 있다..)
관계를 이야기하는 드래곤라자와, 시간을 이야기하는 그 후속작인 퓨처워커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