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에 출시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최신 확장팩, 드레노어의 전쟁군주들에서는 "보물"이라는 새로운 야외 탐색 요소가 추가됐다.

야외 이동 도중 X자로 교차된 칼 표시나 은색 보관함처럼 생긴 표식이 미니맵에 표시되면, 그 곳에서 "보물"을 찾을 수 있다.

나는 탈 것을 이용한 비행이 금지된 드레노어이기 때문에 그리핀/와이번 같은 대중 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땅 위를 달려 이동하다가 심심찮게 보물 또는 희귀 괴물을 만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단순 이동이지만 길찾기의 재미도 있고, 이처럼 숨겨진 무언가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기대감도 가질 수 있다.

아쉬란의 각 진영 도시에는 <고고학 조각> 이라는 꼬릿말이 달린 상인이 있는데, 드레노어의 각 지역별 보물 지도를 장당 100 골드에 판매하고 있다. 

< 아쉬란 호드 진영 도시 "전쟁의 창"에 머무는 고고학 조각 상인 스리카와 그가 판매하는 물건들 > 

 

그리고 구입한 보물 지도를 사용하면, 지도에 아래 그림처럼 엄청난 양의 보물 위치가 표시된다.

< 지도에 나타나는 은색 보관함 표식이 모두 보물의 위치 > 

 

이 중 며칠 전 플레이 도중 발견한 보물에 담긴 이야기가 무척 흥미를 자극해 잠깐 소개해보고자 한다.

서리바람 주둔지에서 마그나로크로 갈 일이 있어 이동하던 중, 마침 근처에 보물이 있길래 지나가다가 들러봤는데 웬 오크 사내가 시체로 쓰러져 있었다. 오크 사내의 시체를 뒤져보니 "모피 두른 두루마리" 라는 쪽지를 찾을 수 있었고,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모피 두른 두루마리의 내용 일부 > 

내용을 보니 연인 관계였던 두 남녀 오크가 서로에게 소중한 물건을 담아 쪽지를 주고 받은 것 같은데, 사내가 품에 안고 쓰러진 것은 상대방인 여성 오크가 쓴 쪽지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쪽지의 내용에서 눈길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이 부분.

"뼈로 길을 표시하겠습니다."

쓰러진 오크 사내 주변을 살펴보니 아래 그림처럼 생긴 화살표 모양의 뼈가 놓여있었다. 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보니 같은 모양의 뼈가 다음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렇게 뼈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 방향을 표시한 뼈 조각. 만약 쪽지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의미를 모른 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

 

뼈 조각을 따라 도착한 곳은 쪽지에 적힌대로 "벌판 너머 북쪽, 화산 뒤에 거대 괴수의 추락지를 굽어보는 장소" 였고, 한 젊은 여성 오크의 얼어붙은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 앉은 상태로 얼어 붙은 오크. R.I.P > 

 

오크 사내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이 오크 여성의 시체에서도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젊은 여성 오크 시체에서 발견한 "모서리가 접힌 쪽지"의 내용 일부. 적대적인 두 부족 사이에서 사랑의 도피를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 

 

내용과 상황을 종합해보면, 두 오크 연인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밀회를 하기 위해 쪽지를 주고 받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여성 오크가 먼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면, 표시를 보고 따라온 남성 오크가 합류해 밀회에 성공하는 계획을 꿈꿨으리라.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남자는 도중에 사망하게 됐고 여성 오크는 약속 장소에서 불을 피우고 기다리다가 땔감이 다 해 불이 꺼지게 됐고, 그대로 동사한 것 같다.

그리고 쪽지와 함께 발견한 서로의 징표였던 "행운의 부적"과 "긴울음의 첫 송곳니"를 하나로 합치면, "이루어지지 않은 갈망의 부적"이라는 고급 목걸이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두 연인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 이루어지지 않은 갈망의 부적. 최소 요구 레벨인 90 레벨 입장에서는 꽤 좋았을 법한 장비다. >

 

신선한 충격이었다. 악마와 영웅의 피와 살이 튀는 대서사시 속에 이처럼 애틋한 로맨스가 숨어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건 오리지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까지만 유효했고, 바쁘게 달려온 이후의 확장팩들에서는 없었을 거라고 속단했다.

물론 모든 보물들이 이 보물들처럼 짜임새있는 이야기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력 컨텐츠도 아닌 양념과 같은 보조 컨텐츠에서, 꽤 적절한 정도의 제작 비용으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게임 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대형 개발사의 저력과 여유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가깝게는 게임 내 등장하는 각종 서적들의 존재부터 꼽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지간한 컨텐츠들을 경험해봤다고 생각해서 무료한 와우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보물 컨텐츠 덕분에 틈나는대로 가능한 많은 보물들을 찾아다녀봐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오랜 동안 잊고 있던, 하지만 와우에서 받았던 가장 큰 첫인상인 "모험"이라는 기대감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라 무척 유쾌하다.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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