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관문'에 해당하는 글 1건

 

이 글은 GDF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GDF 링크: http://gdf.inven.co.kr/t/wow/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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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런치리스의 남자(점심을 거른다는 의미입니다...)인 저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 꿀 같은 아제로스 대탐험을 즐겼습니다.(와우했다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감상을 SNS를 통해 이렇게 남겼습니다.

와우를 다시 하면서 느끼는 건, 와우의 퀘스트가 와우라이크들과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퀘스트 하나 하나의 설계가 아니라 그 퀘스트들을 통해 플레이어가 따라가는 지역 전체에 걸친 이야기 흐름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중요한 건 플레이어 서사였다.

 - 원문 링크: https://twitter.com/zerasion/status/529485062916427777

포럼의 다른 곳에서도 "플레이어 네러티브"라는 주제로 논의된 내용들이 있기도 하고, 사실 많은 네러티브 관련 게임 디자이너 분들께서는 다들 아실 거라고 생각한 내용이라 이렇게 함축적으로만 적어도 그냥 적당히 리마인드 되실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 정리를 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사우 님의 권유가 있어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또 재능 부족한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1. 글로 전하는 일감, 퀘스트

사실 와우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하더라도, 텍스트를 이용한 서사 전달이라는 건 "MMORPG에서 서사 전달이라는 것 자체가 희박했던 시절"에는 꽤나 효과적인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장르에서 그래왔듯, "긁 읽기"말고 다른 것들이 게임에서 더 중요해지면서, 플레이어들은 글 읽는 시간을 아까워했고, 또 긁 읽기 자체를 귀찮고 성가셔하게 되면서 더 이상 텍스트 전달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항상 내게 주어지는 일감"이라는 존재 역시 "MMORPG에서 할 일이라는 것 자체가 모호했던 시절"에는 꽤나 효과적인 플레이 가이드 방식이었습니다만, 이 역시도 수 많은 포스트 와우 게임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퀘스트 = 일"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널리 확산될만큼 비효과적인 컨텐츠가 되어 버렸고요.

그래서 포럼에 옮겨지기도 했던 해외의 사례 (와우의 퀘스트 서사는 죽었다)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이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한 컨텐츠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고, 많은 분들이 이에 고개를 끄덕이셨을 겁니다.

그리고 사실, 새로운 확장팩인 "드레노어의 전쟁군주"가 발매되기 전에 몸풀기 차원에서 와우에 복귀한 저조차도 와우를 오래 플레이한 탓도 있을 것이고, 와우라이크 게임들을 많이 봐 온 탓도 있을 것이고, 게다가 게임개발자로 MMORPG를 수 년간 개발해 온 탓도 있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와우의 퀘스트 시스템이 무척이나 "뻔한 요소"처럼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하나 하나를 곱씹어 봤을 때, "이건 그냥 ㅇㅇ 잡아와라, ㅇㅇ 가져와라일 뿐이잖아? 전혀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요. 물론, 와우를 어느 정도 플레이 한 소위 "와우저"라고 분류되는 플레이어들은 와우의 퀘스트는 결국 심부름일 뿐이라는 위대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고는 하지만, 기라성같던 그런 느낌이 너무 많이 퇴색해버린 기분이 들어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습니다.

 


2. 일감 + 일감 = ??

그런데 오늘 저레벨 얼라이언스로 동부내륙지 퀘스트 후반부를 플레이하던 도중 제법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했습니다.
수 년 간 와우를 하면서 수백 수천 개의 퀘스트를 클리어해왔고, 가급적 거의 모든 텍스트를 읽으면서 진행했음에도 모든 퀘스트를 다 기억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유독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몇몇 퀘스트 시리즈들이 있었는데, 오늘 플레이했던 이 퀘스트 묶음과 기억에 남는 과거의 퀘스트 묶음들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 하나를 알아차리게 됐습니다.

바로 "이야기의 흐름" 입니다.

이미 출시된 지 10 년이 다 된 와우의 퀘스트 하나 하나는, 찬찬히 뜯어보면 생각보다 정말 특이할 게 없는 평범한 "그냥  퀘스트"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와우라이크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어쩌면 더 다양하고 복잡한 기능을 가진 퀘스트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와우의 퀘스트를 10년 동안 찬양하고 있던 걸까요?
저는 위에서 말한 "이야기의 흐름"이 그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와우의 서사 구조는 1레벨부터 최고 레벨까지 한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디아블로와는 다르다는 거지요. 대신 이야기를 어떠한 단락별로 끊어서 구성하는데, 그 단위가 "지역"입니다. 예를 들어 듀로탄에서 플레이하던 흐름과 불모의 땅에서 플레이하던 흐름 사이에, 서사적인 연결 고리가 그다지 강하지 않습니다. 그저 듀로탄의 처음과 끝이 한 단락이며, 다음 지역과의 연결은 불모의 땅에 아무개한테 가면 당신이 할 일이 좀 더 있을 거라는 "소개"의 정도에 그칠 뿐입니다.
대신, 지역 안에서의 흐름은 (물론 지역마다 또 퀘스트 디자이너의 역량 또는 습성마다 다를 수 있지만) 명확한 어떤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진행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와우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덕분에 플레이어가 전체를 인지하기 위해 처음과 끝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플레이타임 기준 상 몇 시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며칠 전에 시작했던 처음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단위의 크고 작음은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부차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본론을 이야기해보자면, 저는 와우의 퀘스트 공식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감 + 일감 ≠ 2일감
일감 + 일감 = 이야기

와우라이크 게임들의 퀘스트들을 플레이하다보면, 직전에 진행했던 이야기가 현재의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주거나 빌미를 제공한다거나 명분을 주는 일이 없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합니다. 즉, 각 일감과 일감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져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앞에서 해온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느껴질 수 있고, "의미 없는 노동"을 했다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할 여지가 됩니다.
하지만 와우의 지역별 메인 퀘스트 묶음은 굉장히 뚜렷한 한 가지 이야기를 주제로 "마치 책을 앞 장부터 한 장씩 읽어가듯" 퀘스트 단위별로 이야기를 조금씩 진행하면서 플레이어가 어떤 "서사"의 한가운데 빠져들게 됩니다.
아마도 이는 접근 방식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여러 개의 퀘스트를 말이 되게 이으는 것"과 "한 개의 큰 스토리를 여러 단계로 작게 나누는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은 미시적으로 낱개의 퀘스트 디자인은 유사할 수 있지만, 거시적으로 통일된 흐름을 가질 수 있는 지 없는 지로 나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3. 일을 하는 장소, 지역

시스템과 시스템, 컨텐츠와 컨텐츠, 시스템과 컨텐츠들이 서로 잘 맞물리는 것이 와우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라는 것은 많은 게이머와 개발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와우의 퀘스트는 그 중에서도 이런 맞물림이 가장 빛을 발하는 대상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퀘스트 디자이너분들이 수백 개의 퀘스트를 그야말로 "찍어내다보면" 많이 놓치게 되는 것이, 다른 컨텐츠와의 연계성입니다. 시스템적으로는 "어디에 갖다 놔도 쓸 수 있는 범용적인 퀘스트 구조"를 제작하는 것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컨텐츠적으로는 반대로 "아까 그거나 이거나 똑같은 것"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는 위험성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조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아까 그거, 거기의 그거와는 다르다고 느끼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을 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되고, 와우는 이를 "지역과의 강한 연계"로 멋지게 해결하고 있습니다.

레벨 디자이너 또는 레벨 아티스트들은 게임의 이야기에 맞으면서도 시각적, 그리고 경험적으로 아름다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그들 업무의 목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퀘스트 디자이너는 종종 우선 순위에서 밀려 "이미 만들어진 레벨에 어떻게든 맞는 이야기를 짜내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와우의 지역별 메인 퀘스트 묶음은 처음부터 협업을 했다고 강하게 생각될만큼, "이야기에 필요한 환경 구성"이 아름다움 속에 함께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령 제가 오늘 점심 시간에 플레이 했던 동부내륙지의 얼라이언스 퀘스트 묶음의 경우, (물론 엄청 에픽한 서사는 아니지만) 처음에는 소소한 잡일(물론 그들은 당장 급하니 이것부터 해주세요라고 둘러대긴 했지만)부터 시작하긴 하지만 중반 이후로는 트롤들이 이 땅에 소환하려고 하는 강력한 영적 존재를 저지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러다보니 이와 관련된 주술과 관련된 소품들이 퀘스트 목표에 들어가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아예 주술적 건물인 "사원"들이 지역 곳곳에 여러 개 배치되어야 합니다. 아마 단지 "퀘스트에 필요하니까 만들어주세요"라고 했다면 보통은 거절당했을 것이고, 반대로 그냥 넣었다면 지역 구성이 서사적으로 설득력을 크게 잃었을 것입니다. 그 지역의 설정에 서사적으로 어울리면서 퀘스트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기 효과적인 구성을 아마도 레벨 디자이너와 퀘스트 디자이너와 레벨 아티스트가 함께 고민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오늘 날 게임 상에 나타난 것처럼 지역과 이야기가 잘 맞물릴 수 있던 건 아닐까 생각됩니다.


4. 퀘스트 묶음의 "소용돌이"화

글을 짧고 간결하게 쓰는 능력이 부족해 주절주절 글이 길어진 것 같아 요약을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이토 준지 작가의 호러 만화 "소용돌이"를 알고 계신가요? 소용돌이는, 일본의 어느 외딴 마을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알 수 없는 현상들이 마을 곳곳에서 일어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전체가 소용돌이가 되어 빨려들어가게 된다는 내용의 공포 만화 입니다. 제가 이토 준지 작가의 만화 중에서 유독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 "연관 없어 보이는 작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알고보니 결국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낸다"라는 구조 때문입니다.
와우의 지역 퀘스트 묶음들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이걸 왜 하는 건지 왜 시키는 건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도 잘 알 수 없는 잡일 같은 걸로 시작해서, 나중에 어떤 막중한 임무 같은 걸 받았을 때 아까 했던 잡일이 이 임무의 밑거름이 되는 그런 경험을 심심치 않게 겪을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소림사에 가면 왜 시키는 지 알 수 없는 허드렛일을 하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동들이 무공 수련을 돕고 있었다는 설정의 무협물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와우의 인상적인 퀘스트 묶음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손에 꼽는 오리지널 얼라이언스 진영의 아버지와 아들 퀘스트나 윈저 경 호위 퀘스트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호드라 그것들을 경험해보지 못한 탓에 다른 퀘스트를 떠올리곤 합니다.
아마 많은 노스렌드의 영웅들이 기억하고 계실, "분노의 관문"과 관련된 포세이큰(언데드)의 역병 퀘스트 묶음입니다.


노스렌드에 막 도착한 70 레벨의 플레이어는, 시작점에 따라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언더시티에서 비행선을 타고 도착한 동쪽에서 시작하는 호드 진영의 플레이어들은, "포세이큰의 역병" 퀘스트 묶음을 수행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포세이큰들이 이웃하게 도착한 얼라이언스와 분쟁을 벌인다거나, 노스렌드의 토착 생물들을 파악하고 연구를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조금씩 진행하면서 크고 작은 야생 동물부터 드래곤이나 납치한 얼라이언스 포로, 심지어 같은 호드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역병 제조에 박차를 가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플레이어 캐릭터들이 열심히 노동한 결과들 덕분에 이뤄낸 성과고요. 그렇게 열심히 역병을 만드는 데 성공한 플레이어는, 이후 포세이큰과는 동떨어진 다른 이야기 속으로 지역을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역병은 잠시 기억에서 잊혀지게 되죠.
그러다 마침내, 분노의 관문이라는 곳에서 아래와 같은 장엄한 영상이 펼쳐집니다.

분노의 관문 동영상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2oDAIJIL6H4

여기서 포세이큰이 등장하는 시점에, 역병 퀘스트를 수행했던 캐릭터들은 알아차리게 됩니다.
"아! 저거 내가 만든 역병이구나!"
이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와우를 플레이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서사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주는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역병이 이렇게 멋지고 강렬하게 보이고 있어!"라는 기분이었죠.

플레이어의 영향력이 게임 세계에 크게 반영되지 않는 와우라는 게임의 구조 상, 이야기에 의미있는 어떤 일을 플레이어가 해냈다는 느낌을 갖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느낌을 줬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야기가 다시 길어졌지만, 결국 이것은 다른 문화컨텐츠에서 사용하는 "복선"과 유사한 매커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추리물에서 결과를 미리 알면 맥이 빠지는 것처럼, 복선도 "이것이 복선입니다!"라고 표시되면 굉장히 매력이 떨어집니다. 따라서, 처음 기반작업과 같은 일들이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으로 미래의 일을 암시하지 않는 것은 복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지켜져야 하는 규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과거의 복선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될 때, 오히려 플레이어에게 더 큰 쾌감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대단히 길)게 와우의 퀘스트 구조가 가지는 강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는데요, 덕분에 쉬어가는 판다리아의 안개를 넘어 힘주어 자신있게 개발했다고 말하는 드레노어의 전쟁군주에서는 또 어떤 지역과 이야기들로 이런 짜릿함을 느낄 수 있게 될 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능력이 부족한 자의 긴 이야기를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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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볼만한 토픽:

[GDF] MMOG의 집단서사: http://gdf.inven.co.kr/t/mmog/67
[GDF] MMO의 연쇄 퀘스트는 죽었는가 http://gdf.inven.co.kr/t/mmo/498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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