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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랑고:야생의 땅" 일러스트레이션]

 

 

1. 가죽 장화

 

지난 5월 27일, 판교 테크노밸리의 한 건물 지하에 마련된 강연장.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 속에 시작된 패기와 재치 넘치는 한 게임 디자이너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업계 전체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이번 NDC에서는 업계인들 뿐만 아니라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유명인사인 닉네임 파파랑의 이은석 디렉터, 그의 신작 "듀랑고:야생의 땅"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던 강연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많은 이들의 눈길과 발길을 사로잡은 것은 "가죽 장화 시리즈"로 불리는 "가죽 장화를 먹게 해주세요 / 가죽 장화를 먹게 해달라고?"의 두 연작 강연이었습니다. "가죽 장화를 먹는다"는 파격적인 소재와 "해주세요-해달라고?"라는 게임제작인들에겐 끝나지 않는 RvR 소재인 게임 디자이너 vs 프로그래머라는 대결 구도의 강연 배치까지. 무엇 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이유가 없어보였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방증처럼, 무려 문명 온라인과 관련된 내용을 들고 나온 송재경 대표의 강연이 동시간이라는 것도 무색할 정도로 가죽 장화의 강연장은 의자에 앉지 못한 참석자들이 통로 바닥에 앉아서 들어야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NDC2014 가죽 장화를 먹게 해주세요 프레젠테이션]

 

뚜껑을 연 가죽 장화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개발자들이 "이런 걸 해보면 어떨까? 근데 될까?"라고 고민만 하던 내용들을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해봤습니다."라고 덤덤한 어조로 전달하며 큰 충격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마치 콜럼버스가 탁자에 달걀을 깨뜨리는 모습 같았습니다. 강연 시작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온갖 방식을 떠올리며 "이렇게 했을까? 아니면 저렇게 했을까?"하는 추측들을 떠올렸던 것 같은데요, 디자이너가 설명해 준 사고의 흐름과 정리된 개념들을 보면서 무릎을 탁 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비유와 무릎을 탁 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듣기 전까지는 떠올리지 못했지만 듣고 나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아주 멋진 해법을 보여줬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2. 아이템의 구성, 속성과 특성

 

두근거림에 대한 서론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제가 이해한 듀랑고의 아이템 구조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이 매커닉이 출발한 발상의 기점은 강연 초반에 나온 "아이템의 용도를 결정하는 주체가 개발자가 아닌 플레이어이길 바랐다."는 부분이라고는 생각되는데요, 이는 이후 29일 발표된 이은석 님의 "창발적 디자인"이 듀랑고의 핵심 요소라는 걸 감안할 때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레이어가 게임플레이를 주도할 수 있도록 상향식(Bottom-up)과 블랙리스트 기반 디자인을 사용한 듀랑고이기에 디자이너는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뼈대가 되는 규칙들을 설정하고, 각각의 요소들이 명확한 규칙 안에서 제한 없이 플레이어의 바람에 따라 흘러갈 수 있도록 아이템을 디자인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NDC2014 가죽 장화를 먹게 해주세요 프레젠테이션]

 

강연자였던 왓!스튜디오 이정수 디자이너의 정리에 따르면, 듀랑고의 아이템을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속성""특성"으로 분류됩니다. 속성은 다른 게임들의 아이템들이 가지는 속성과 다른 새로운 성질의 것들로 이뤄져 있는데 대표적으로 "날카로움", "딱딱함", "에너지가 있다"와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특성은 이러한 속성들이 모여 어떠한 구분점을 갖는 것들을 지칭하는데, "입을 수 있다", "먹을 수 있다", "가죽" 등이 그것입니다. 아이템 1.0으로 명명한 첫 번째 단계에서는 속성과 특성이 각각 별도로 관리되며, 디자이너가 직접 수동으로 특성을 입력하는 태깅Tagging 방식으로 구현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규칙을 간단한 수준으로 정리하기 어려웠고, 일일이 수동으로 부여되는 태그 덕분에 데이터 안정성에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디자이너 또는 시스템이 통제 가능한 범위로 내용을 정리해, 태그 속에 속성들이 포함되는 이전 보다 딱딱한 규칙으로 구현 방향을 돌렸고 이것을 아이템 2.0으로 명명했습니다. 하지만 의외성 부족으로 인해 창발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결과가 나타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아이템 3.0이 진행중이라고 했습니다.

 

[두들갓 조합식 화면]

 

이같은 속성과 특성의 관계를 보고 처음 떠오른 것은 두들갓Doodle God 이라는 게임이었습니다. 두들갓은 미리 정해진 조합식에 따라 두 원소를 합치면 새로운 원소를 발견할 수 있는 게임인데, 특정 원소를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의 조합식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불에 타는 원소는 무엇이라도 불과 섞으면 재Ash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천적 관계의 두 생명체를 섞으면 대체로 시체 또는 피를 발견할 수 있고요. 하지만 이 게임의 조합은 상향식으로 디자인된 하위 단계의 규칙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하나 미리 설정된 조합식에 따라서만 조합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프로그래머의 강연에서 아이템 3.0을 간략하게 소개받을 수 있었고, 이 단계에서 속성과 특성의 관계는 속성들이 모이는 규칙에 따라 특성이 자동으로 발생하는 방식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단계부터는 직전까지 추측했던 두들갓 방식의 조합 구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적절한 예시 게임과 시스템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오래지않아 어느 유명 게임의 시스템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몬스터헌터의 장비 스킬 시스템.

 

[몬스터 헌터 장비 스킬 테이블 화면]

(몬스터 헌터 스킬 계통과 스킬 페이지: http://www.nintendo.co.kr/3DS/MH4/manual/c07s03.php)

 

몬스터헌터의 장비는 그 하나 하나를 착용한다고 해서 어떤 스킬(옵션)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몬스터헌터의 장비 정보를 살펴보면 여느 RPG 게임 아이템처럼 "무슨 능력치 플러스 몇(ex. 지능 +3)"과 같은 옵션 정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검술, 통격, 귀마개, 배부름처럼 독특한 이름의 "스킬포인트"가 정수(양수와 음수를 포함) 형식으로 적혀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텐데요, 바로 이런 스킬포인트들이 모여 일정한 수치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각각의 스킬들이 발동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격력에 영향을 주는 "공격" 포인트의 경우, +10/+15/+20 포인트를 만족했다면 각각 "공격력UP 소/중/대" 스킬이 발동하고, 반대로 -10/-15/-20 포인트를 만족했다면 각각 "공격력DOWN 소/중/대" 스킬이 발동합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자신에게 유리한 스킬을 발동시키면서 불리한 스킬은 발동시키지 않기 위해 장비를 세팅하게 됩니다. 그리고 플레이어의 이런 장비 선택 고민이 유의미할 수 있도록 각각의 장비 파츠들은 + 포인트와 - 포인트를 함께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동시킬 스킬만 집중하면서 장비를 세팅하다보면, 어느새 나쁜 스킬들이 한가득 따라오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합니다. 기본 규칙은 심플하게 디자인한 뒤, 컨텐츠 단계에서 다양성을 확보해 플레이어에게 풍성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상향식 디자인의 성공 사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몬스터헌터의 스킬 발동 매커닉처럼, 듀랑고에서는 속성들이 모인 상태에 따라서 각각의 특성들이 "발동(발현)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각각의 스킬 포인트가 하나의 스킬 발동과 1:1로 연결된 몬스터헌터와는 달리, 듀랑고의 경우 여러 속성들의 조합 상태에 따라 특성이 발현되는 방식이라면 동시에 여러 종류의 특성이 발동되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컨텐츠 통제가 훨씬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특성이 한 개의 아이템에 동시에 발현되는 등의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발하지 않도록 특성들의 발현 조건을 보다 섬세하게 조율하는 작업이 디자이너에게 요구될 것 같습니다.

 

 

 

3. 아이템의 가공, 레시피

 

듀랑고에서는 태그라는 이름의 특성들을 통해 그 안에 담겨 있는 아이템의 속성을 파악하고 가공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레시피"라고 통칭하고 있습니다. 여러 강연 자료를 통해 볼 수 있는 "도끼를 만드는 방법"처럼, 날붙이, 접착제, 막대라는 태그를 가진 아이템들을 모아 레시피를 통해 고유한 무기로 "상태를 변경"할 수 있어 보입니다. 레시피의 가장 큰 특기 사항은 이것이 단지 다른 게임에서 "아이템 조합"이라고 불리는 시스템을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생산과 건설 시스템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대체 수단의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월드에 배치된 모든 식생들은 그 자체로 아이템이거나 아이템을 가지고 있고, 생산 레시피를 통해 "상태를 변경"하는 구조로 추측됩니다. 즉, 아이템을 생산 또는 채집해 플레이어가 손에 넣는 시점에서 이미 그 아이템은 최초의 아이템이 아닌 이미 가공된 아이템이 되는 구조로 생각됩니다.

 

 

[디아블로3의 전리품 2.0이 적용된 아이템 툴팁 화면]

 

아이템 제너레이팅 방식만 놓고 보면, 이러한 방식은 전혀 낯선 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아주 익숙한 방식일 수도 있고요. 디아블로3 전리품 2.0 시스템의 스마트 드랍을 생각해보시면, 우선 사용자의 조건(현재 플레이 중인 캐릭터 레벨과 클래스)을 판단한 다음, 해당 조건을 만족하는 옵션의 종류와 성능의 범위Boundary 안에서 아이템의 최종 속성들이 결정되는 것은 이미 익숙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사용자의 조건을 판단하는 부분을 어떤 경로와 도구로 아이템을 생성하려고 했는지 판단하는 것으로, 옵션의 종류와 성능의 범위를 부여할 속성의 종류를 결정하는 것으로 각각 대입해보면 레시피의 가공 구조를 개념상으로나마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태전이 테스팅 모델 예시]

(출처: http://sten.or.kr)

 

하지만 앞서 아이템이 레시피를 통과하는 동작을 "상태의 변경"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제가 파악한 듀랑고 아이템 시스템의 핵심적인 차별점이었습니다. 강연에서는 "분해"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는데요, 다른 게임의 분해라는 컨텐츠처럼 전혀 다른 아이템으로 교환해주는 방식이 아닌, 마치 Windows OS에서 Ctrl+Z 키를 누른 것처럼 레시피를 거꾸로 돌려 아이템의 상태를 "되돌리는 방식"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상태의 변경은 마치 어떤 순환 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물의 순환(구름-비-강-바다-다시 구름)이나 QA 시절 배웠던 상태전이 테스팅(State Transition Testing)같은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에서 파악해 본 레시피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생성 조건을 파악한 뒤 조건에 맞는 아이템 초기값을 제너레이팅 (생성)
2) 각각의 레시피들이 초기값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정보를 더하거나 기존의 정보를 뺌. (가공)

 

[하스스톤 게임 화면]

 

블리자드의 카드 게임 하스스톤을 예로 들어보면, 맨 처음 어떤 하수인 카드를 전장에 냈을 때 그 카드의 기본 공격력과 생명력이 흰 색으로 적용될 것이고 이 부분이 (비록 랜덤 및 계산과 같은 프로세스의 개입은 없지만) 듀랑고의 아이템 생성 단계와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카드를 내는 순간 기존의 다른 주문 등의 영향으로 기본 공격력/생명력 값에 변화가 생긴 상태로 전장에 배치가 됐다면 이는 특수한 조건이 만족된 상태(수확량이 좋은 계절에 채집을 했다거나 좋은 수집 도구를 썼다거나)에서 아이템을 생성한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초기값으로 배치된 카드에 주문 또는 특수 능력을 가진 하수인의 효과를 적용해 값에 변화를 준다면, 증가한 값은 녹색으로, (생명력의 경우) 감소한 값은 적색으로 나타나게 되고, 마찬가지로 이를 듀랑고의 레시피를 통한 아이템 가공 단계와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히 수치를 올리거나 내리는 것처럼 초기값의 일부 또는 전체를 다른 값 또는 상태로 변화시키는 정도가 있을 수 있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생성 단계에는 없었던 정보를 추가하거나 있던 정보를 제거하는 일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스스톤에서 다른 하수인에게 도발, 돌진, 천상의 보호막, 죽음의 메아리 등의 효과를 추가로 부여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하스스톤에서 침묵 주문이 가지고 있는 효과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WoW의 그것과 같은 "더 이상 주문 능력을 사용할 수 없음"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적용된 변화(그 중 버프류)를 되돌림"입니다. 듀랑고에서 레시피를 역으로 돌려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분해 행동은 이 중 후자의 효과와 일맥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4. 고민해볼 내용들

 

하지만 여기서 구현 시 중요한 부분을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나씩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꼽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가공 구조의 규격화

 

우선 레시피라는 개념을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위에서 파악해 본 레시피의 특징은 데이터 단계에서 아이템이 본래 가지고 있던 정보를 가공하는 것인데요, 가공하는 대상의 존재 유무에 따라 두 가지 상황을 예측해볼 수 있습니다.

 

(a) 데이터에 있는 정보를 변경:

이 때에는 어렵지 않게 미리 아이템 데이터에 포함된 속성들의 값 또는 종류를 바꿔줄 수 있을 것입니다. 레시피를 적용하기 전에 레시피가 가공할 속성을 가지고 있는 지 먼저 검사하는 조건만 있다면 적용 전의 아이템을 선별하는 것과 적용된 후의 아이템 상태를 예측하는 것 모두 디자이너의 인지 범위 안에 있을 것입니다.

 

(b) 데이터에 없는 정보를 가감:

이 때에는 아이템 데이터에 해당 속성이 이미 있었는 지 없었는 지 판단하지 않고, 레시피가 어떤 속성을 부여하거나, 기존에 데이터에 존재하는 속성을 제거하는 등의 가공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최초 아이템 데이터에 설정한 속성들에서 크게 벗어날 우려가 있고, 그 때문에 가공 단계를 여러 차례 거칠 수록 디자이너의 인지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이 점차 증가할 것입니다.

 

듀랑고는 현재까지 이같은 가공 방식에 대한 규격화가 진행되지 않아 각 레시피마다 서로 다른 동작 방식을 가진 상태고 그에 따라 디자이너가 일일이 스크립트로 제작해야 하는 생산과 관리 양 쪽 모두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연 초반에 보여준 "[플레이어]가 [대상]에게 [행동]한다"같은 포괄적인 개념 정리 방식을 도입해보면 꼭 2차원 데이터 테이블 형식이 아니더라도 그 가공들의 공통된 규칙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레시피]는 [속성]을 [가공]한다"처럼요.

개인적으로는 액셀성애ㅈ..아니 데이터 테이블 애호가이기 때문에, 블로그의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조건에 따른 컬럼의 활용법"을 통해 어떻게든 구현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Z] 당신의 소중한 Data Table 컬럼, 이제 아껴쓰세요: http://zerasion.tistory.com/41)

 

문득 떠오르는 컬럼들의 내용들을 읊어보자면...

 

레시피 ID

레시피 이름 (내부명칭을 쓰는 공간과 실제 스트링을 불러올 공간은 구분이 필요)

레시피 종류 (생산, 조합, 건설 등등)

가공 방식 (있는 걸 바꿀건지, 없는 걸 넣을 건지 등)

요구 속성 (있는 걸 바꿀 경우, 어떤 속성이 있어야 레시피가 동작할 건지)

속성 보존 (요구 속성에 기입한 항목을 레시피를 통해 변경할 건지, 레시피 필요 조건으로만 체크하고 속성을 유지할 건지)

변경 속성 (다른 속성으로 바꾸려는 경우, 어떤 속성으로 변경할 건지 or 없는 걸 넣을 경우 어떤 속성을 넣을 건지)

값 연산 종류 (값만 변경하려는 경우, 합연산을 할 건지 곱연산을 할 건지)

(얼만큼 값을 변경할 건지)

정도네요.

물론 저는 듀랑고의 아이템이 어떤 종류를 얼마나 포함하고 있는지, 그리고 디자이너가 아이템의 가공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혀 부적절한 내용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강연을 통해 유추해 본 내용상으로는 이런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 변수의 저장 방식

 

앞서 하스스톤의 예시에서처럼, 최초에 데이터 단에서 설정된 아이템의 초기 값(흰 색 숫자)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각종 주문과 전투의 결과들에 의해 변화된 현재의 값(녹색 또는 적색 숫자)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전자를 초기값, 그리고 후자를 변수라고 불러보겠습니다.

 

초기값은 미리 데이터에 심겨진 내용이며 업데이트나 패치로 인해 데이터가 변경되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 값이기 때문에 각각의 정보가 고유하게 관리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누가 뭘 몇 개 가지고 있다더라" 정도의 정보가 필요할 뿐이겠죠. 그리고 하스스톤의 카드들 역시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 동안에는 이런 초기값들만 유효하기 때문에 덱에 어떤 카드를 몇 장 세팅했는지 정도만 저장할 공간이 확보되면 됩니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주문과 전투로 변경된 상태들이 각각 "이 카드는 지금 어떤 어떤 상태야"라는 게 저장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변수들이 각각의 상태에서 저장되야 하는 게임들이 있습니다. 아이템의 내구도가 손상된다거나 강화나 마법부여 등으로 아이템의 능력치가 변경되는 RPG류의 게임들이 이런 게임에 속하죠. 그리고 단일 아이템에 영향을 주는 변수들이 한 개가 아니라 두 세개 이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예를 들어 내구도, 강화 단계, 옵션 부여 종류, 재연마 상태, 보석 홈 갯수, 박혀있는 보석의 종류 등) 각각의 변수들을 곱한만큼 경우의 수는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듀랑고의 경우 아이템의 생성과 가공이 이같은 변수 방식으로 판단되고 있다면, 각각의 상태들을 저장해줘야만 하고 저장 공간이 변수의 종류와 숫자만큼 많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우의 수를 조합해서 임의의 ID를 부여해 숫자만 관리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창발적인 조합을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듯)

 

만약 초기값과 변수의 "현재 상태"만 저장한다고 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기존의 게임들 구조와 유사한 수준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간에 어떤 어떤 형태가 있었는지는 판단하고 기억하지 않고, "그래서 지금 결과가 뭔데?"만 집중한다면 말이죠. 그런데 이 부분을 어렵게 만드는 한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앞서 언급했던 "분해"가 그것입니다. 전혀 다른 재료 아이템으로 환원해주는 분해가 아닌, 이전 상태로 복원해주는 분해이기 때문에 모든 과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전 얼마만큼 또는 별도로 설정된 어떤 값들 만큼은 "중간 변화 단계를 저장"해줘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에 듀랑고의 아이템 분해가 하스스톤의 액션 히스토리(상대와 내가 수행한 모든 카드 액션이 왼쪽 바에 기록되는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레시피 이력을 추적하는 것을 요구한다면, 구현을 위해 어마어마한 DB가 요구되거나 상부의 구현 승인이 떨어지지 않겠죠.

 

따라서 어느 정도 저장할 정보들을 덜어내는 절차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가장 심플하게 초기값과 현재 상태만 저장하는 것으로 하고 아이템 3.0에서 설명한 "발현되지 않은 속성 정보"라는 것이 중간에 레시피를 통해 심겨지기만 한다면, 디자이너 입장에선 아닐 수 있더라도 적어도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변화, 즉 돌연변이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문제 시 됐던 분해 시 되돌려 줄 정보의 경우는, 어차피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Ctrl+Z 해주는 방식은 아닐 것으로 추측되니 별도의 분해를 대비하기 위한 저장 공간을 확보해 두고 그 곳에 분해 시 다시 심어줄 속성 정보만 별도로 관리해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치 필요한 데이터를 쿼리를 통해 DB에서 추출하는 과정처럼, 분해 역시 역(逆) 레시피를 통해 지정된 속성들만 꺼내서 복원시켜준다면, 모든 히스토리를 저장하지 않아도 적정 수준의 되돌림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마무(으)리

 

여기까지가 제가 듀랑고의 디자인 강연 발표들을 토대로 이해하고 추측해 본 아이템의 구성과 가공 구조입니다. 어디까지나 제한된 정보를 토대로 추리에 가까운 형태로 재구성한 내용들이기 때문에 실제 구현 내용과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방식의 매커닉을 한번 쯤 디자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게임 디자이너가 비단 저 뿐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디자이너 분들은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계신지 무척 궁금하네요. =)

무척이나 두서 없는 글이었지만 굳이 결론을 세 줄 요약해보자면...

 

 

 

 

1 듀랑고 빨리 출시해주세요,

 

2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3 엉엉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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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출퇴근길에 짬짬이 즐기는 스마트 게임인 타운십Township에 대해 짤막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첫인상

우선 타운십의 장르는 일반적으로 팜 게임Farm Game이라 불리는, 무언가를 재배하고 수확하면서 경영하는 것을 핵심으로 디자인된 게임입니다.

사실 처음 이 게임을 다운로드하고 실행하게 만들었던 원동력은, 제가 좋아하는 타운즈맨Townsmen이라는 다른 게임과 유사한 화풍 때문이었습니다. SNS 등에서 순전히 개인적인 추천욕구 때문에 종종 추천하곤 했었는데요(전문용어로는 이를 영업이라고 하죠?), 타운즈맨의 가장 큰 흥미 요소는 마치 고전게임인 새틀러처럼 내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NPC들의 꼬물꼬물 거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틀러와 타운즈맨과 이 타운십은 단순히 화풍만 비슷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NPC의 꼬물꼬물거리는 반응들이 주는 느낌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화면 안에 작은 세계가 재현되는 느낌이죠. 중세 배경인 타운즈맨을 현대판으로 재해석한 느낌이 타운십의 첫인상이었습니다.

조작

 튜토리얼에서 알려주는 타운십의 기본 조작은 터치와 스와이프(또는 페닝) 입니다. 작업할 곳을 터치한 다음, 대부분의 작업을 버튼 터치가 아닌 직접 화면에서 해당 객체들을 문지르는 것으로 조작합니다. 수많은 버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팜 게임들과는 이런 기본적인 차이가 있어 게임에 몰입하기가 편하더군요. 예를 들어 2개 이상의 밭에 작물을 심을 때는, 빈 밭을 터치하면 하단에 나타나는 작물들의 종류 중에서 원하는 작물을 터치한 상태로, 심고자 하는 밭들에 쭉 문지르면(마우스의 드래그와 유사합니다) 한 번에 같은 작물을 여러 밭에 심을 수 있습니다. 수확도 마찬가지로 재배가 완료된 밭을 터치하면 낫 아이콘이 화면 아래쪽에 나타나는데, 그 낫을 누른 상태로 재배 완료된 작물들 위로 손가락을 문지르면 한꺼번에 수확할 수 있습니다. 밭 뿐만이 아니라 사료공장, 양계장, 빵집 등 여러 생산 건물에서 이 조작 방식을 공통적으로 사용합니다.

 

친구팔이(?)의 부재

그리고 팜 게임들은 대체로 소셜네트워킹 요소를 강조한 SNG라는 형태의 모델인 경우가 많은데요, 타운십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혼자 플레이하기에 적당한 템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뭔갈 할 때마다 "친구의 도움을 받으세요!"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x 명의 친구를 당신의 마을에 초대하세요!"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친구팔이에 시달리지 않고 시간을 가지고 느긋하게 즐기기에 적당하다는 점도 참 매력적입니다.

자원의 순환

타운십의 자원 순환 고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밭에서 재배"

2) "공장에서 가공(1차~n차)"

3) "생산품을 소비"

4) "소비된 생산품은 다른 자원(골드와 경험치 또는 다른 물자)으로 환원"

5) "레벨업을 통한 가용 생산 시설의 추가 확보"

6) "시설을 배치할 공간이 필요"

7)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돈과 인구 수가 필요"

8) "인구 수 확보를 위해 공공 시설이 필요"

9) "공공 시설 건설을 위해 건설 자재(자체 생산 안됨)가 필요"

10) "건설 자재를 위해서는 생산품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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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십은 기본적으로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생산의 시작은 밭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밭에서 밀, 옥수수, 사탕수수, 목화 등을 재배한 다음, 그걸로 사료나 빵, 또는 옷감 같은 것을 만들고, 다시 그렇게 1차 가공된 것들로 케잌, 의류, 치즈 같은 2차 가공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언가를 생산할 수록 경험치가 쌓이게 되고, 경험치가 쌓이면 마을의 레벨이 오릅니다. 마을의 레벨이 오르면 게임 경험이 있는 플레이어들이라면 쉽게 떠올릴 수 있듯이 추가로 사용할 수 있는 컨텐츠가 열리고요(흔히 해금, 또는 Unlock이라고 하는 방식). 컨텐츠가 확장되면 더 많은 시설을 사용할 수 있고, 더 많은 시설을 사용하기 위한 토지가 점점 많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 토지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다시 일정 이상의 인구 수가 필요하게 되고, 인구 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공공 시설을 건설해야만 합니다.

생산한 물건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소비할 수 있습니다(순환표의 4) 단계). 하나는 마을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물품을 제공하는 "주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마을(다른 친구의 마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시스템이 가져갑니다.)로 "기차"에 실어 보내는 것입니다. 생산품들을 저장할 공간이 부족해 곳간(일반적으로 창고라고 불리는 것)에서 직접 판매하는 방식은 MMORPG에서 NPC상점에 아이템을 판매하는 것처럼 사실상 버리기에 가깝기 때문에 소비처로 분류하지 않았습니다.

생산품들을 소비할 때는, 기본적으로 유료 결제를 하지 않는다면 곳간(저장공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매번 요구하는 물건들을 그때 그때 생산해야 합니다. 마침 내가 잔뜩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요구하는 주문이나 기차가 떠준다면 그야말로 땡큐베리감사를 외치면서 즉시 주문/기차 완료를 누르면 되지만 그런 일은 생각만큼 자주 일어나지 않더군요. 따라서 요구하는 물건들의 종류와 수량에 따라 하나 하나 처리하는데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문"은 보상 주기 면에서 가장 자주 발생하는 주요한 돈과 경험치 획득 수단입니다. 대략 1 가지에서 4 가지 사이의 물건들을 요청하는데, 완료하기 버튼을 누르면 헬기가 해당 주민의 위치까지 물건을 싣고 날아갔다가 돌아옵니다. 요구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헬기가 돌아올 때까지 다른 주문을 완료할 수 없습니다. 헬기가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이 주문의 쿨다운 시간(재사용 대기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대략 20초 내외 정도로 매우 짧습니다. 게다가 한 번에 발생하는 주문의 총 개수는 항상 7 개씩 일정하게 유지되므로, 매 주문을 완료할 때마다 즉시 새로운 주문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진행하고 싶지 않은 주문(터무니없는 수량을 요구하는 주제에 보상이 별로라거나)는 거절할 수 있고, 그 경우에는 19분 뒤에 새로운 주문이 추가됩니다. 무분별한 걸러받기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죠.

"기차"는 대략 1 시간 이상의 쿨다운 시간이 존재하는 제한된 컨텐츠지만,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마을에서 직접 생산할 수 없는 물건을 얻을 수 있는 핵심 수단"입니다(순환표의 10) 단계). 마을에서 생산할 수 없는 물건의 종류는 모두 건설자재들이고, 건설자재는 이름 그대로 건물을 짓는데에 필요한 물건들입니다. 생산건물들을 짓는 데 필요한 자원은 오직 게임머니 뿐이지만, 마을 확장에 요구되는 인구증가를 가능하게 해주는 공공 건물(극장, 세탁소, 까페 등 실제 플레이어가 조작하지는 않는 건물들)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게임머니 외에도 많은 숫자의 건설자재가 필요합니다. 플레이어가 기차로 할 수 있는 일은, 기차마다 각각 요구하는 이 마을에서 생산한 물건들을 먼 마을로 실어 보내고, 그 마을들로부터 답례로 건설자재를 받는 것 입니다. (물자를 실어보낸 기차가 건설 자재를 싣고 돌아올 때까지의 부분에서 보낸 마을의 위치에 따라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러니까 공들여 생산한 생산품들을 주문에 쓸 지 기차에 쓸 지를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타운십에서 자원 순환 구조에서 플레이어들이 가질 수 있는 의미 있는 선택지가 됩니다. ("시장"을 짓고 나면 건설자재를 바로 구입할 수 있는 경로가 생기지만, 이 때 요구하는 자원은 캐시포인트이므로 부차적인 경로로 판단했습니다.)

 

Post F2P?

앞서 타운십의 구조에 대해 짤막하게 알아보았습니다만, 그렇다면 대체 제목에 쓰여있는 탈(脫, Post) 부분유료화(F2P; Free to Play)라는 건 어느 부분에서 나타나는가?는 여전히 알 수 없으실 겁니다.

F2P라고 불리는 부분유료화 모델에서 지금까지 핵심적인 수입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플레이어들에게 유료 서비스를 판매하는 방식입니다. 일단 게임을 시작하는데에는 돈이 들지 않지만,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현금을 요구하는 방식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어 왔지만 대체로 "돈을 내지 않으면 제대로 진행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강한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곤 합니다. 의도적으로 불편을 주고, 돈을 내면 그 불편을 제거해주겠다는 방식이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겪지 않아도 되는 불편을 강요당하는 일종의 심리적인 폭력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플레이어는 "동네 건달 형님들이 노점상에서 자리세를 걷어가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이 방식은 편의 기능을 판매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편의 기능은 대체로 고가로 판매되는 상품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고가로 판매되는 상품들은 플레이어의 성능을 직접적으로 향상시켜주는 것들이고, 이것은 편의 기능 판매와는 또다른 불만을 발생시킵니다. 바로 "공정성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주게 되는 점이죠. 업계에서는 Pay to Win(이하 P2W), 그러니까 승리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면 된다는 방식을 일종의 공식처럼 사용하고 있는데요, 기존에 다른 게임을 오랫동안 플레이해 온 "게임은 실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야 한다"는 가치가 굳게 자리잡은 게이머들일 수록 그 가치와 반대되는 P2W 방식에 강하게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캐시 안쓰고도 이만큼이나 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전 욕구마저 자극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해 단순히 가격 면에서가 아니라 소재 자체에서 구매 저항이 상당히 높게 발생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과금 방식을 극복한 사례들도 나타나고 있는데요. 월드 오브 탱크 같은 경우, 다양한 방법으로 패배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내서 돈을 써서 승리한 자와 돈에 패배한 자 모두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덕분에 세간에서 F2P 2.0 으로까지 칭송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프레임(Frame)이라는 단어를 빌려보자면, 기존 F2P 과금 방식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내지는 못했다는 것이 한계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저는 타운십에서 사용한 수익 모델을 F2P 2.0 또는 3.0이라는 방식으로 부르는 대신, Post F2P라고 불러볼까 합니다.

타운십에도 이같은 유료 서비스들이 제공되고 있긴 한데요, 사실 게이머 입장에서 봤을 때 이게 얼마나 잘 팔릴 지는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굳이 구입하지 않아도 플레이하는 데 큰 불편이 없거든요. (물론 곳간의 저장 공간 부족 문제는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곳간..! 곳간..!!!) 다만 주문 부분에서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했습니다.

평소와 같이 타운십을 켰던 어느 날, 주문 화면에 못 보던 황금 테두리의 주문이 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보상도 무려 1 캐시포인트 더군요. 딱히 어떤 생산품을 요구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주문 완료 버튼이 원래는 "전송"이라는 글자가 나타나는 곳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보기"라고 떠있더군요. 소중한 1 캐시포인트를 받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보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오오... 동영상 광고가 나오더군요. 크래시 오브 클랜, 붐 비치와 같은 기존 해외 유명 작품들의 광고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게임 오브 워 같은 최신작들의 광고까지 보여주곤 합니다. 대략 15초? 20초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것 같은데, 특이한 점은 다른 웹 서비스들의 광고 영상들과는 달리 건너뛰기(Skip)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습니다. 한번 "보기"를 누르면 1 캐시포인트를 인질로 삼고(?) 광고가 끝날 때까지 중단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시간이 다른 주문들을 완료하러 헬기가 뜨고 내리는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좀 짧은 느낌이 있어 별로 신경쓰이지 않더군요. 게다가 소중한 생산품을 갖다 바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하면 1 캐시를 주는 거였습니다! 묘하게 기쁘더라고요. 처음 생긴 것부터 황금 테두리라 특별해보이더니, 그냥 광고만 보면 1 캐시를 준다는 게 전혀 기분나쁘지 않고, 나쁘기는 커녕 오히려 즐겁더군요. 몇 번 반복하고 났더니 이제는 광고가 다시 나와주기를 기다리는 지경까지 됐습니다.

월드 오브 탱크에서는 플레이어에게 돈을 쓰는 일이 즐겁도록 만든 것이 대단히 뛰어난 F2P 전략이었다면, 타운십에서는 플레이어가 돈을 쓰는 일 없이 광고비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점도 플레이어에게 반갑긴 하지만, 그 광고 역시 다른 게임들의 배너 방식처럼 여전히 짜증과 불편을 유발하는 게임 외적인 장치가 아니라 게임 안으로 끌어들여 오히려 고급스러운 컨텐츠로 탈바꿈시켰다는 것이 뛰어난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오래 전부터 게임 안에 광고를 넣는 것에 대한 움직임은 계속 있었습니다. 제가 S.U.N.을 미주 대륙과 유럽 지역에 서비스하는 업무를 하던 때에도, 국내를 포함한 아시아권에서는 그저 게임에 새로 업데이트된 컨텐츠를 소개하는 용도로만 사용하던 마을 게시판에 외부 사이트 광고를 유료로 실어주곤 했습니다. 그 전부터도 웹젠에서는 회사 차원으로 (비록 게임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헉슬리나 파르페스테이션 등의 마을에 광고를 넣을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시도됐었거든요. 하지만 이런 방법들도 여전히 게임의 한 요소로 광고를 끌어 안는 것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유튜브에서도 대략 5초~7초? 정도 광고를 강제로 재생하고 그 뒤에는 건너뛰기가 가능하도록 서비스하고 있는데요, 다른 일 하느라 건너뛰기를 하지 않고 광고를 그냥 둔 적이 있었는데 준비된 영상은 TV 기준 15초보다 훨씬 긴 30초 정도가 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광고마다 총 길이는 다 달랐던 것 같지만요. 만약 제가 광고주의 입장이라면, 30초 동안 재생될 것을 기대하고 돈을 들여 영상을 만들고 다시 돈을 들여 광고를 걸었는데, 확정적으로 고객들에게 노출되는 시간이 고작 5초뿐이라면 굉장히 손해보는 기분이 들 것 같았습니다. 집에서 IPTV로 VOD를 보더라도 1~2 개의 광고가 건너뛰기 불가능한 상태로 보여지는데 말이죠.

타운십에서 광고 자체만 놓고 봤을 때, 1) 광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여준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가 광고를 긍정적으로(심지어 기쁘게!) 대한다. 라는 부분이 굉장히 멋진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것을 게임 내 요소 일부로 가져온 것도 훌륭했고요. 그리고 만약 주 수입원이 유료 상품 판매가 아닌 광고 수익이 될 수만 있다면, 요즘 F2P 게임들이 게이머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상태를 벗어나 돈을 요구하지 않고도 플레이어들에게 더 나은 게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고, 그로 인해 플레이어의 모수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광고가 노출될 대상도 늘어날 것이므로 다시 광고 수익이 늘어날 것도 기대할 수 있는 선순환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정리

시골에서 보내던 어린 시절, 인삼 농사를 지으시는 동네 어르신께 "인삼을 재배한 밭은 1~2년 동안 다른 작물을 심을 수가 없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삼이 토양의 양분을 과도하게 빨아먹어서 다시 토양이 재생될 때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학교에서 사회 시간에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을 배우게 됐습니다. 요약하자면, 환경을 파괴하면서 급격한 발전을 추구하면 오래도록 존속할 수 없으니, 환경을 지키면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발전할 수 있는 형태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지금 당장의 수익을 위해 지금까지의 F2P가 고수하던 다소 과격한 과금 방식을 남용하다보면, 장기적으로는 환경에 해당하는 "게임 시장"이 말라버리게 되는 결과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이 흔히 말하는 "황금 알을 낳는 오리 배를 가르는 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도 다른 글의 말미에서도 말한 적이 있듯이, 개인적으로는 게이머와 개발자, 개발자와 게이머가 서로 다른 꿈을 꾸지 않고 같은 꿈을 꾸는 "게임을 사랑하는 동료"가 되는 날을 꿈꿔봅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 중에, 타운십에서 사용한 광고 수익을 통한 서비스 무료화라는 방식도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굉장히 매력적인 모델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타운십 링크

애플 앱스토어: https://itunes.apple.com/kr/app/kkum-ui-ma-eul-township/id638689075?mt=8

구글 플레이: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playrix.township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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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GDF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주소: http://gdf.inven.co.kr/viewtopic.php?f=14&t=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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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2월 27일 목요일. 디아블로3의 아시아 서버에도 마침내 신규 확장팩 "영혼을 거두는 자"의 사전패치인 2.0 패치가 적용되었습니다.

오늘은 세간에서 "2년 간의 오픈 베타 기간이 끝났다!"고도 평가되는, 그리고 많은 용사들을 다시 성역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이른 바 "개념패치"로 불리는 디아블로3 패치 2.0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세부 내용이 적힌 패치노트 전문은 아래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디아블로3 공식 사이트: 2.0.1 패치가 적용되었습니다.)

 

 

1. 새로운 난이도 구조

일반Normal, 악몽Nightmare, 지옥Hell.

이것은 이전 시리즈인 1편과 2편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던 난이도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난이도는 반드시 이전 단계의 난이도를 "클리어 한 이후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3편에 와서는 이를 확장한 네 번째 난이도이자 지옥 난이도의 상위 단계인 "불지옥Infernal"이라는 단계를 추가해 이제까지의 난이도 구조를 더욱 곤고히 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구조의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반복 플레이의 강제"라는 부분이었습니다.

플레이어의 숙련도나 강함같은 요소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모두가 똑같이 난이도 숫자만큼 게임 시나리오의 처음과 끝을 반드시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제되는 반복 플레이는,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숫자만큼 늘어나 더 큰 부담을 가중시키기도 했습니다. 단방향으로 진행되는 시나리오 구조의 특성과 게임의 수명을 유지시켜주는 반복 플레이의 유도가 서로 상충해 플레이어에게 좋지 못한 경험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대안을 내놓게 됩니다.

이번 2.0 패치에서는 마치 예전 콘솔 게임들이 가지고 있던 "쉬움, 보통, 어려움"과 같은 난이도 선택 방식처럼, 한 번의 시나리오 플레이를 진행하는 동안 자신의 실력에 맞게 난이도를 더 어렵게, 또는 더 쉽게 조절할 수 있는 방식이 적용됐습니다.

그리고 이 바탕에는, 캐릭터의 레벨이 증가하면 악마들의 레벨도 따라서 증가하는 이른 바 "몬스터 레벨 스케일링Monster Level scaling"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아레나넷ArenaNet의 길드워GuildWars2에서 낮은 레벨의 지역에 입장한 캐릭터의 레벨을 강제로 지역에 맞게 하향 조정하던 것의 반대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플레이어가 몇 레벨이던 간에, 악마들과의 레벨은 항상 일정한 간격으로 유지됩니다. 하지만 점점 더 강력한 아이템을 손에 넣게 되면서, 캐릭터는 자신의 레벨을 뛰어 넘는 강함에 도달하게 되고 게임의 난이도는 점차 쉬워질 것입니다.

몬스터들의 강함이 고정되어 있던 이전까지의 난이도 구조에서라면 약해진 몬스터들을 무의미하게 쓰러뜨리면서 자신의 강함에 맞는 적당한 난이도에 도달할 때까지 진행했어야 하지만, 새롭게 개편된 난이도 구조에서는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만큼 난이도를 높여 도전하면 됩니다.

보통 - 어려움 - 고수 - 달인 - 고행 단계로 구분된 새로운 난이도 구조에서는, 난이도가 높아질 수록 몬스터들이 강해지지만 그만큼 높은 보너스의 혜택도 같이 받게 됩니다. 난이도가 증가함에 따라 경험치와 금화 습득량, 그리고 마법 아이템 획득 확률에 각각 더 많은 보너스를 얻게 되면서 캐릭터가 강해질 수록 성장 속도가 더욱 가속화되는 구조로 개편되었습니다.

(기존의 각 단계에서 적용할 수 있던 악마 강화 단계는, 고행의 단계가 1~6 단계로 제공되는 형태로 변경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레벨의 플레이어가 같은 방에 존재할 경우, 몬스터가 어떤 값의 레벨로 조정되는 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2. 전리품 2.0

디아블로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악마를 무찔러 캐릭터를 단련시키고 그들이 떨어뜨린 장비를 통해 더욱 강해져, 다시 더 강한 악마를 무찌른다"는 반복순환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리즈마다 비율의 차이는 있었지만) 여기서 캐릭터의 성장을 담당하는 두 축은 능력치와 장비였고, 한계점 까지 성장한 캐릭터의 능력치 이상의 강함에 도달하기 위해 강한 장비를 획득하기 위한 반복 플레이를 "아이템 파밍Item Farming"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있는 상식 수준의 내용일 것입니다.

하지만 개발자 노트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3편에 와서는 "경매장"이라는 새로운 수익 모델 덕분에 시리즈의 전통이었던 "악마 사냥을 통한 아이템 획득"이라는 기본 순환 구조가 파괴되었고, 악마와 싸우는 대신 경매장에서 원하는 옵션의 물품이 등록되길 기다리며 새로고침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용사들을 원치 않던 개발사는 "경매장 폐쇄"라는 강경책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디아블로3 공식 사이트: 경매장이 곧 닫힐 예정입니다.)

기존의 아이템 드랍 구조에서는 대부분의 아이템들이 난이도와 막(Act)이라는 컨텐츠의 강도에 따라 그 종류와 부여되는 옵션들이 무작위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캐릭터에게 필요한 아이템이 떨어질 확률도 낮았을 뿐더러, 자신에게 맞는 아이템이 떨어졌다고 해도 부여된 옵션이 자신에게 유용할 확률은 훨씬 더 희박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는 필요 없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필요할 지도 모를 아이템들을 서로 교환하는 일이 이전 시리즈부터 성행하게 됐습니다. 혼자 구하는 것보다, 여럿이 구하는 쪽이 훨씬 확률이 높은 것은 간단한 계산이니까요.

하지만 개발팀 입장에서는, 이러한 아이템의 거래라는 행위가 사실상 자신들의 의도대로 전체 플레이어들에게 제공되는 아이템들의 품질과 양을 제어할 수 없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배틀넷Battle.net이라는 온라인 공간과 싱글 캠페인의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아이템 가치가 큰 격차를 보이게 됐습니다.

따라서 2편과 3편의 패치 내용(지옥문 장치)에서는 거래되는 아이템들보다 상위 등급의 아이템들은 거래가 불가능한 설정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기준선 이상에서의 제어만 가능했을 뿐이었습니다.

경매장의 폐쇄에 앞서, 이번 2.0 패치에서는 금화, 제작 재료, 전설 등급 이상의 아이템에 대해 추가적으로 플레이어 간 거래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자급자족의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전리품 2.0"은 이러한 거래 제한 정책에 대한 돌파구 입니다.

전리품 2.0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떨어지는 아이템이 자신에게 유용한 아이템일 확률이 늘어난다.

- 특정 직업 전용 아이템의 경우, 불필요한 옵션이 부여되지 않는다.

- 이와 같은 맞춤형 아이템 습득 확률은, 대장장이를 통한 아이템 제작에도 적용된다.

즉, "타인의 도움 없이도 자신에게 필요한 장비를 더 잘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패치"가 바로 전리품 2.0 입니다.

경매장도 금화나 아이템 거래도 불가능해져 원하는 아이템을 얻기 어려워진 플레이어들에게, 직접 사냥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던 전투보다 경매에 시간을 할애해야 했던 기형적인 플레이 패턴을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데 크게 일조합니다.

 

 

3. 정복자 2.0

 

이번 3편에서는 본편 최고 레벨인 60레벨에 도달한 플레이어들이 지속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도록 성장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써 "정복자 레벨"이라는 시스템을 적용했었습니다.

(디아블로3 공식 사이트: 정복자 시스템을 소개합니다.)

정복자 레벨은 최대 100레벨까지 성장 가능한 새로운 방식의 레벨이며, 레벨이 증가함에 따라 직업별 주 스탯과 골드 획득량, 마법 아이템 획득 확률이 증가하는 마치 "옵션 증가"에 가까운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직업 주 스탯과 마법 아이템 획득 확률이라는 옵션 자체가 주는 메리트가 컸기 때문에, 많은 플레이어들이 지겨움을 무릅쓰고 정복자 레벨 올리기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추측되는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 확장팩에서 최고 레벨 상한이 상향되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 이를 보상해주면서 적용시킬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당시의 정복자 시스템 기준에서 추측해볼 수 있었던 가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최고 레벨이 상향되도 정복자 레벨이 유지될 것인가?

- 최고 레벨이 상향되면, 정복자 레벨은 60 레벨부터 적용되는가 아니면 70 레벨 부터인가?

- 이미 누적된 정복자 레벨은 60 레벨부터 적용되지만 70 레벨부터 다시 증가된다면, 그 동안에 적용되는 아이템 습득 확률 옵션의 차이로 플레이어 간 장비 격차가 벌어지지 않을까?

- 만약 60 레벨에서 정복자 100 레벨 달성 이후에 61 레벨이 될 수 있다면, 플레이어 간 격차가 말도 안되게 벌어지지 않을까?

- 반대로 정복자 레벨을 없애버린다면, 그간 쌓아온 정복자 레벨은 무엇으로 보상될 것인가?

 

하지만 이번 2.0 패치에서 정복자 시스템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구조로 완전히 바뀌면서 위의 의문들을 한 번에 해소했습니다.

- 정복자 레벨은 포인트로 환산되어 계정 전체의 캐릭터에 공유된다. (스탠다드 / 하드코어 모드는 분리되어 각각의 정복자 레벨 적용)

- 기존에 제공되던 옵션 대신, 새로운 포인트가 부여된다. (일반/공격/방어/지원이라는 네 분류에 각각 순서대로 1 포인트씩 부여)

즉, 정복자 레벨이라는 것은 캐릭터의 레벨이 아닌, "계정 전체에 적용되는 누적 성장 포인트"와 같은 개념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정복자 2.0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새로운 캐릭터를 키우기 편하다"는 점이 됩니다. 내 계정의 정복자 레벨이 100 레벨이라면,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해 1 레벨의 다른 직업 캐릭터가 생성되도 마찬가지로 100 포인트의 정복자 포인트를 투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설명드린 새롭게 개편된 난이도 구조와 더해져 더욱 빠른 성장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4. 새로운 강화 효과

이전까지 사용되던 전투 흐름 유도 장치로는 "네팔렘의 용맹"이라는 용사 또는 희귀 악마를 처치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버프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디아블로3 공식 사이트: [정보] 강화 효과 - 네팔렘의 용맹)

60 레벨의 캐릭터가 용사 또는 희귀 악마를 처치하면, 골드 획득량과 마법 아이템 획득 확률이 증가하는 30 분 짜리 버프를 받게 되고 버프가 지속되는 동안 다른 용사/희귀 악마를 처치하면 다시 30 분으로 남은 시간이 초기화 되면서 최대 다섯 번까지 중첩되는 시스템 이었습니다. 링크에도 적혀있다시피 특정 구간을 반복해서 플레이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개발팀의 의도가 잘 느껴지는 시스템이긴 했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버프가 해제되는 조건들 중에 "스킬 또는 룬을 변경하면 해제"되는 조건 때문에 상황에 맞는 유동적인 스킬 세트 운용이 불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일반 필드를 돌아다니면서 용사/희귀 등급의 몬스터를 처치하면서 네팔렘 5중첩을 쌓는 동안에는 다 수의 몬스터와 상대하기에 적합하면서 빠른 이동에 효율적인 스킬 세트를 운용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5중첩을 쌓은 이후에 보스 몬스터에게 파밍하러 갈 때에는 다시 보스전에 적합한 스킬 세트로 바꿀 수가 없다는 점은 제법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번 2.0 패치에서는 네팔렘의 용맹 버프를 삭제하는 대신, 이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두 가지 강화 효과를 새롭게 추가했습니다.

 

1) 투영의 웅덩이

 

성역을 돌아다니다보면 기존의 생명력/마나 회복샘과는 다른 황금빛의 웅덩이를 발견하게 되며, 그 효과는 무려 "경험치 획득 보너스 +25%"입니다. 효과가 적용되는 범위는 현재 레벨 업까지 필요한 경험치 량의 10%. 하지만 중요한 건 이 효과는 "캐릭터가 죽으면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생존에 대한 긴장감을 높여가면서 경험치 혜택을 위해 조심 조심 전투를 진행해야 합니다.

 

2) 힘의 구슬과 네팔렘의 영광

 

성역의 악마들을 처치하다보면 기존의 피의 구슬과는 다른 황금빛의 구슬을 발견하게 됩니다. 힘의 구슬이라는 이름의 이 황금 구슬을 먹게 되면 "네팔렘의 영광"이라는 버프가 1 분간 적용이 되며, 확률적으로 발동되는 강력한 추가 피해와 이동 속도 증가 효과가 적용됩니다. 재미있는 점은 힘의 구슬을 습득하는 것으로 최대 3중첩이 가능한 것 뿐 아니라, "피의 구슬을 먹으면 약간의 버프 시간 연장"이 된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플레이어는 네팔렘의 영광 버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몬스터를 사냥해 힘의 구슬 또는 피의 구슬을 획득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효과 덕분에 기존에는 크게 매력이 없었던 "몬스터 처치 시 피의 구슬 생성 확률 +n%"라는 옵션이 네팔렘의 영광 버프 유지 시간을 늘려주는 매력적인 옵션으로 가치가 상승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빠른 전투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달려가야 하는 네팔렘의 영광과, 반대로 경험치 보너스를 유지하기 위해 죽지 않으려고 천천히 진행하게 되는 투영의 웅덩이 덕분에, 플레이어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급진적인 플레이와 보수적인 플레이 사이에서 내적 갈등이 유발되게 됩니다. 따라서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현재의 전투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끊임없이 제공해줍니다.

 

 

5. 완전한 순환 구조

지금까지 살펴본 2.0 패치의 큰 부분들의 특징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강화 효과, 이벤트 요소(저주받은 궤짝/신단), 악마들의 능력 등을 통해 전투와 생존 자체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2) 난이도 구조의 개편으로 억지스럽던 반복 플레이 경험을 개선한다.

3) 정복자 2.0으로 새로운 캐릭터 육성을 전폭 지원한다.

4) 아이템 2.0으로 아이템 획득이라는 반복 플레이의 목적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다시 이 특징들을 종합해볼 때 내릴 수 있는 판단은,

"2.0 패치는 본격 하드코어 모드 권장 패치다."라는 결론입니다.

 

위의 각 특징들이 어떻게 하드코어 모드와 연결되는지 짚어보겠습니다.

"1) 새로운 피처들을 통한 전투와 생존에 집중 유도"는 이미 말 그대로 "사망은 캐릭터의 영원한 종결"을 의미하는 하드코어 모드에서 반드시 필요한 지침과도 같습니다. 죽어봤자 수리비 정도가 필요할 뿐인 기존의 스탠다드 모드에서는 미시적인 플레이에 집중하기보다, 일정 시간동안 얼마나 성장했고 어떤 아이템들을 습득해서 어느 정도의 수익을 냈는 지에 대한 거시적인 플레이에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요소들을 통해 미시적인 플레이에 보다 집중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하드코어 모드 진입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양을 갖출 수 있게 지원해줍니다.

"2) 난이도 개편으로 반복 플레이 경험 개선"과 "3) 정복자 2.0을 통한 새 캐릭터 육성 지원"은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이 두 요소의 조합을 통해 "반복적인 새 캐릭터 육성에 대한 획기적인 지원"으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스킬 세트와 정복자 포인트의 초기화가 용이하고 대부분의 아이템이 캐릭터 귀속이 아닌 계정 귀속 방식이 적용된 3편의 구조 상, 스탠다드 모드에서는 같은 직업의 캐릭터를 추가로 육성할 이유가 전무합니다. 하지만 하드코어 모드에서는 지속적인 캐릭터의 사망으로 인해 신규 캐릭터의 생성과 플레이가 상당히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고, 따라서 스탠다드의 "해보지 않은 직업 육성"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난이도2.0 x 정복자2.0의 시너지 효과에 혜택을 받게 됩니다.

정복자 레벨이 올라있는 상태에서 신규 캐릭터를 키우면 정복자 포인트를 투자해 캐릭터를 강화할 수 있으므로 더욱 높은 난이도로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높은 난이도로 플레이하면 경험치 부스트를 적용받게 됩니다. 그리고 정복자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더 높은 난이도를 수행할 수 있게 되므로, 신규 캐릭터를 육성하는 데 드는 시간은 점점 단축되게 됩니다.

그리고 정복자 2.0의 핵심적인 기능 중 하나인 "정복자 레벨을 캐릭터 정보가 아닌 계정 정보로 분리"한 것의 효과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보겠습니다. 과거에는 정복자 100 레벨의 캐릭터 사망이 그야말로 모든 것의 상실과도 같은 치명적인 사건이었지만, 이제는 정복자 100 레벨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새롭게 1 레벨의 캐릭터를 키우는 데에 여전히 효과적인 "유효한 힘의 대물림"이 가능해 하드코어 플레이어들의 상실감 완충에 매우 효과적입니다.

"4) 아이템 2.0을 통한 아이템 파밍 강화"는 1차적으로는 앞서 설명한대로 직접 전투를 통한 아이템 획득을 유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위에서 설명하지 않은 이 기능 덕분에 보다 하드코어 플레이를 기대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기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더 이상 고정된 수치의 옵션을 갖지 않는다.

- 아이템 툴팁이 표시될 때 Ctrl 키를 누르면 능력치의 최소-최대값 범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전설 아이템을 자꾸 자꾸 떨어뜨려 아이템 획득에 대한 욕구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한편, 이와 같이 "전설 등급의 아이템 역시 반복적으로 여러 번에 걸쳐 최고 단계의 아이템을 습득"하도록 자극한다는 점입니다. 무려 내가 습득한 장비가 현재 어느 정도의 옵션 수치를 가지고 있는 지, Ctrl 키를 눌러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부분에서 그야말로 플레이어들을 어떻게든 지속적으로 악마와의 전장으로 몰아넣으려는 개발팀의 강력한 의지마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어째서 개발팀은 이토록 플레이어들에게 하드코어 모드를 플레이하도록 권장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그 대답을 "완전한 순환 구조"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미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하드코어 모드에서 캐릭터의 사망은 모든 것의 소멸입니다. 캐릭터를 더 이상 플레이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지니고 있던 착용 장비와 인벤토리 소지품까지 모두 소멸됩니다. 2편에서 처음 등장한 이 하드코어 모드는, 그래도 당시에는 시체 루팅이라는 시스템 덕분에 다른 하드코어 캐릭터가 사망한 캐릭터의 소지품을 주웠다가 새로 만든 캐릭터에게 마치 "선조의 유품"처럼 전달해주는 플레이가 가능했었습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3편의 하드코어 모드는 시체 루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플레이어가 사망할 때 1편처럼 바닥에 소지품을 흩뿌리지도 않습니다. 고스란히 악마의 차원문 너머 블리자드 사의 서버 소스 어딘가로 소멸되어 버릴 뿐입니다. 그럼 이러한 소멸은 게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스탠다드 모드에서는 아무리 죽어도 캐릭터가 사라지지 않고, 아이템 역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 번 플레이어가 습득한, 그러니까 게임의 입장에서 한 번 생성된 아이템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 둘씩 강력한 용사들이 최고 레벨의 장비를 손에 넣고 나면, 디아블로3라는 게임은 더 이상 플레이할 이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Game Over가 찾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개발팀은 자신들의 게임을 즐겨주는 플레이어가 언제까지나 성역에 남아있어주길 바랄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더 높은 아이템을 만들어 넣어, 그들이 계속해서 올라갈 어떤 지점을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대로 "한 번 생성된 아이템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부분 때문에 개발팀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넣는 것과 그로 인해 지금까지 만들었던 것이 그 아래에 쌓여 썩어가는 것을 슬퍼할 겁니다.

한 편 하드코어 모드에서는, 생성된 아이템 또한 캐릭터의 사망과 함께 소멸합니다. 스탠다드 모드에는 존재하지 않던, 생성과 파괴라는 순환 구조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높은 아이템을 제작하기 위해서만 아이템을 분해하게 되는 스탠다드의 제한적인 아이템 소멸과는 달리, 하드코어 모드에서는 주력으로 사용하는 강력한 아이템들이 캐릭터와 함께 소멸합니다. 그 결과는? 무조건 더 좋은 아이템만이 유일한 필요 장비가 되는, 마치 끝나지 않는 레이스 같은 스탠다드 모드와는 달리, 캐릭터의 성장과 함께 모든 레벨 구간의 아이템들이 꾸준히 필요하게 됩니다. 실제로 60레벨의 대중화된 장비 이하와 그 이상이 엄청난 가격 차이를 보였던 스탠다드의 경매장 시세와는 달리, 하드코어 모드의 아이템 시세는 낮은 레벨의 장비부터 최고 레벨의 장비까지 고르게 시세가 분포되어 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경제 개념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투명한 논리입니다. 장기적으로 플레이어와 개발팀이 오랫동안 함께하기 위해서는, 개발팀 입장에서 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하드코어 모드를 즐겨주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드코어 모드는, 말 그대로 자신이 애착을 갖고 플레이했던 캐릭터가 "사망"이라는 엄청난 상태를 맞이할 수 있는 모드입니다. 따라서 모든 로그라이크 게임들이 그러하듯,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경험을 자주 겪게 되며 그 것이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에게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일 것이라는 것도 자명합니다. 그래서 이 같은 플레이어 부담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사망 후에도 유지되는 강함의 등장, 그리고 다시 새로운 캐릭터를 키울 때 그 강함을 통해 더욱 빠른 육성 지원과 같은 적극적인 장치들을 대거 배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곧 발매될 예정인 확장팩 "영혼을 거두는 자"에서 적용될 "모험 모드"와 모든 것이 랜덤하게 적용되는 "네팔렘의 차원 균열"같은 무한 컨텐츠 등의 라인업을 보면, 개발팀의 개발 비용을 최소화 한 상태에서 보다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반복 플레이의 유도로 이 같은 순환 구조에 대한 의도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 플레이가 적용될 때, 계속해서 재화가 누적되는 스탠다드보다는, 끊임없이 생성과 파괴가 반복되는 선순환 구조의 하드코어 모드가 장기적으로 더 유리할 것이라고 쉽게 추측해볼 수도 있습니다.

 

 

6. 아쉬운 점

하지만 위와 같은 완전한 순환 구조를 목적으로 한 짜임새 있는 패치 구성에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고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전체적인 패치 방향이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각각 개인 플레이 위주로 진행하면서 힘을 합치는 "객체 지향적 협동 플레이(가칭)"에 있다고 하더라도, 배틀넷이라는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군집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제공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다는 부분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개발팀에서도 이같은 군중 속의 고립감이 문제시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것의 해소 차원에서 클랜과 커뮤니티 시스템을 2.0 패치에서 제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애석하게도 이는 체감상 "단순한 채팅 채널의 추가" 정도의 영향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기능상으로는 클랜명이 캐릭터명과 함께 표시되며, 커뮤니티의 경우에는 인 게임 게시판을 지원하기도 합니다만 그다지 체감이 되는 수준의 커뮤니티 구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붙잡아두는 데에는 사람만큼 좋은 컨텐츠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이용한 컨텐츠로는 "협동"과 "경쟁"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료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번 3편에서는, 난투장이라는 알 수 없는 컨텐츠로 제대로 된 PvP 경쟁 컨텐츠를 제공하지 못했던 데 이어, 클랜과 커뮤니티라는 알 수 없는 인터페이스의 추가로 제대로 된 협동 컨텐츠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어차피 배틀넷 2.0이 적용된 스타크래프트2 부터 싱글 플레이든 멀티 플레이든 온라인 접속이 강제되는 현 시점에서, 디아블로3의 접속 이후 화면은 지금의 쓸쓸한 영웅 혼자 성역의 어딘가에 황망하게 서 있는 화면이 아닌, "네팔렘의 전진 기지"와 같은 이름의 채팅 로비로 이동되는 것이 더 적절한 분위기 연출이 아니었을까요?

굳이 비싼 제작 비용을 들여 3D 모델링 된 수 십, 수 백 명의 영웅 캐릭터가 화면에 돌아다니지도, 아예 나타나지도 않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분위기의 아트워크를 활용한 인터페이스와 사용자 리스트만으로 충분히 효과적인 전진 기지의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진 기지의 한 켠에는 클랜원들을 위한 클랜 캠프가 있고 그 안에 들어가면 다시 클랜원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인스턴스하게 존재해도 좋을 겁니다.

어떤 모양인지 잘 떠오르질 않는다면, 아래 그림을 통해 어떤 모양새일지 대강의 그림을 떠올려보실 수 있을 겁니다. 바로 4Leaf Browser의 화면입니다.

 

4Leaf Browser의 켈티카의 거리 아트워크가 디아블로3의 각종 월페이퍼와 같은 톤으로 바뀌기만 해도 충분히 의도가 전달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이번 3 편의 대기 화면 구성은, 싱글 캠페인과 배틀넷 로비를 무리하게 한 곳으로 합치다가 벌어진 일종의 인터페이스 표현의 한계같은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아쉬운 부분은, 개인과 개인들의 플레이가 서로 하나의 목표로 귀결되는 "공동의 목표"와 같은 컨텐츠가 없다는 점입니다. 비록 디아블로라는 IP가 본래 각각의 방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인스턴스한 플레이에 기반한다고 해도, 경매장과 같은 거대한 연결고리를 계획했던 프로젝트이니만큼 보다 직접적으로 각각의 개인들을 묶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성역 침식도"같은 시스템을 고안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PS2 베르세르크 성마전기의 장에서 나오는 "마물잔존율"이나, PC MMOFPS 파이어폴에서 초즌Chosen들의 "인커젼", "인베이젼"에 침략당하는 플레이어들의 영역처럼 악마들에게 성역이 침공당한 정도를 수치와 그래프를 통해 보여준다.

- "성역 침식도"는 개개인에게 별도로 제공되는 정보가 아닌, 서버 단위의 공통 정보이다. 즉, 같은 서버의 모든 플레이어는 서로 똑같은 성역 침식도를 공유한다.

- "성역 침식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수치가 증가한다. 침식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플레이어들이 악마를 처치해야 한다.

- "성역 침식도"의 수치가 낮을 수록, 매직 아이템 발견 확률 옵션 수치가 큰 폭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모든 플레이어들은 침식도를 낮춘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게임에 임한다.

- 영원히 0이 되지 않는 네버엔딩 구조로 침식도를 구성하거나, 또는 주기별로 리셋되며 0으로 만들면 클리어되고 각각의 플레이어마다 기여도에 따른 차등 보상을 적용받는 세션제로도 구성해볼 수 있다.

이처럼 공통의 목표를 보여줌으로써 플레이어들은 각각의 플레이가 거시적으로 어떤 영향을 세계에 끼치는 지 파악할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협력과 경쟁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새로운 래더 시스템은 성역 침식도와 함께..!

 

전체적으로 상당히 짜임새있는 디아블로3의 이번 2.0 패치는 개발팀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플레이어들이 지난 시간 동안 요구해오던 내용들의 수용 안에서 적당한 지점에 잘 자리잡은 듯한 탄탄한 업데이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월 말에 있을 "영혼을 거두는 자" 공개에 앞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디아블로3에 관심을 갖고 돌아오게 만드는 아주 성공적인 업데이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말미에 적었던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들까지 조속한 시일 내에 더 멋진 모습으로 반영되서, 진정한 완전체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래더와 투기장의 조속한 패치를 바라며, 두서없는 패치 살펴보기를 마치겠습니다.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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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차

 

북미 PvP 서버에 입성.

 

뭘해야 하는 지도 모른 채 아무 이유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총/도끼를 맞고 사망. 움직이는 물체나 불빛을 보면 두렵다.

밤이 찾아오고, 처음 지급받았던 토치마저 꺼져버려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어슴프레한 달빛으로 시야를 확보한 채 어디론가 정처없이 헤매다보니,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만나는 인공가옥에 도착했다.

건물 안에는 캠프 파이어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혹시나 누가 남기고 간 음식이 있지 않을까 싶어 뒤져보려 했지만, 실수로 불을 지피게 됐다.

장시간 어둠 속에서만 머물다가 빛을 보니 왠지 반가운 마음에 잠시 머무르려던 찰나, 뭔가 위험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리고 캠프 파이어를 지펴둔 채 건물 밖으로 황급히 자리를 피했는데 건물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캠프 파이어 근방에서 총성이 울려퍼졌다.

아마도 누군가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약탈하기 위해 찾아온 모양이다.

나는 아직 이 곳에서 살아갈 준비가 안된 것 같아서 황급히 접속을 종료했다.

 

 

북미 Non PvP 서버에 입성.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죽지 않는다는 안도감에 심적 부담감이 한결 줄어들었다.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손에 들고 있는 돌(Rock)로 주변의 나무를 닥치는대로 채집해봤지만 막상 뭘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채팅창에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이야기들을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회화 수준이라 영어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직 게임을 잘 몰라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음.)

어느덧 다시 밤이 찾아오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 토치를 들고 어디론가 정처없이 헤매다가 저 멀리 산기슭에서 불빛 같은 것이 새어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불빛을 보면 두려움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던 방금 전의 PvP 서버에서와는 달리, 이 곳에서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불빛을 찾아다니게 된다는 것이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다.

도착한 곳에서는 한 무리의 일행이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한 남자(사실 이 게임의 모든 플레이어는 아직 남자..)가 어썰트 라이플의 라이트와 레드핑?(저격수들의 소총에 장착된 빨간 조준 레이져. 명칭을 모르겠다.)을 이용해 지면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보이스챗으로 뭐라뭐라 바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캠프 파이어에 먹을 것이 없나 뒤적거리던 나를 발견한 그 남자는, 갑자기 내게 배가 고픈거냐며 치킨을 바닥에 던져줬다.

그의 호의가 감동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뭔가 창피했다. 거렁뱅이처럼 보인 것 같아서...

배고픔 게이지가 바닥을 치고 있던 터라 허겁지겁 치킨을 뜯어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아까 준 치킨을 다시 돌려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뺐어가나 치사 뿡이다 싶었는데, 자기들 먹을 것도 안 남기고 다 줘서 그렇다며 몇 개만 달라고 말했을 때 다시 나의 거렁뱅이같은 심보가 부끄러워졌다. 생존 게임을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되서 뼛속 깊이 거렁뱅이가 된 것 같다..

치킨 몇 조각을 돌려받은 그는 갑자기 다른 동료들에게 "줍지마 줍지마 줍지마"라고 외치면서 바닥에 재료들과 활과 화살 무더기를 쏟아냈다. 그러더니 내게 가져가라며 (테이킷 테이킷 테이킷 할 때는 마치, 디아블로2 오리지널 엔딩에서 티리얼로 위장한 바알에게 마리우스가 소울스톤을 내밀던 모습이 떠올라 조금 우스웠다.) 크래프팅 메뉴 사용 방법을 알려주더니 이걸로 당분간 먹고 살라며 노잣돈(..) 같은 걸 쥐어줬다.

그들과 좀 더 플레이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내 점심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기에 후일을 기약하며 게임을 종료했다.

 

 

- 2일 차

 

북미 Non PvP 서버 - 생존 체험

 

어제의 북미 non PvP 서버에 접속했지만, 상냥한 일행이 내게 주었던 활/화살/재료들과 그리고 치킨(!!!!)이 사라졌다. 완전 깔끔한 새 캐릭터. 손에 들려진 돌덩이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거점을 잡고 세이브포인트로 삼지 않으면 몇 번이고 오늘처럼 무의미한 시간만 흘러갈 거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도 최소한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까지는 터득해보자며 튜토리얼 기간이라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밤이 찾아왔고(낮이 너무 짧게 느껴지지만 그것은 기분 탓이었다..) 대로변을 따라 여행하던 터라 근처에 누군가 지펴놓은 캠프 파이어를 발견하고 잠시 몸을 녹이면서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냥한 그가 건네준 치킨(!!)을 뜯어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있었는데, 갑자기 캠프 파이어 위로 두 어명의 사람이 뛰어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자마자 커다란 곰 한 마리가 그들을 덮쳤다. 두어 번 총성이 울리고 곰이 쓰러졌는데, 마침 내가 가장 가까이에 있어 손에 들고 있던 돌로 곰을 내리쳐보게 됐다. 오.. 신천지다. 이제 껏 도무지 어디서 얻어야 할 지 몰랐던 각종 동물성 재료들이 채집됐다. 이 세계의 채집은 "후려친다"로 통일되어 있었나 보다.

불그스름하게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캠프 파이어에 모여있던 일행들은 하나 둘 제 갈길로 떠나기 시작했다.

채팅을 통해 "방위표시 인터페이스가 없으니 해와 시간을 짐작해 방위를 파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나는, 아무 이유없이 남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초원을 거닐던 도중 간 밤의 곰 사냥 때와 비슷한 상황이 찾아왔다. 누군가 나를 앞질러 달려갔고 그 뒤를 늑대 한 마리가 빠르게 쫓아가고 있었다. 남자가 달려간 쪽을 보니, 일행으로 짐작되는 서너 명의 사내들이 총을 들고 서있었고 일제히 뒤따라오던 늑대에게 총구를 겨눴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 않아 고개를 돌려 다시 남쪽으로 달려가는 내 등 뒤로, 서너 번의 총성과 늑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운치있는 수렵의 현장.

하지만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팀 단위로 사냥하는 무리들을 본 뒤에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련없이 서버를 나와, ModPat 님이 플레이하고 계신 사설 서버로 입장했다.

 

 

FireIn 커뮤니티 서버 입성.

 

ModPat 님께 간략한 서버 룰의 설명을 들은 나는, 전체 채팅창에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섬을 둘러보기 위해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평지 끄트머리에 제법 규모있는 건물이 보여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 명의 사내가 튀어나와 내게 말을 걸어왔다.

A: 웨얼 아 유 프롬?

B: 어디서 오셨어요?

나: (채팅으로) KOR.

A: 오, 반갑습니다. 처음이신가봐요?

나: Yes.

내가 한국인임을 확인한 두 한국인은 내게 호의의 표시로 치킨(!!!)을 건네줬다. 땡스를 연발하며 주워담은 치킨을 뜯으며 돌아서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후방에서 데미지가 가해졌다). 들짐승인가싶어 뒤를 돌아보려는데 한 차례 더 충격이 전해지더니 바닥에 쓰러져가는 내 귀에 A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ㅋㅋ 굳ㅋㅋㅋ"

아마도 B가 활이나 총을 쏜 것 같다. 역시 외국에 나가면 한국 사람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더니.. 믿을 놈 하나 없.. 이 아니라 PvP 서버의 시스템에 충실한 그들을 칭찬해주기로 마음먹고 리스폰을 눌렀다.

그래, 이 곳은 PvP 서버다. 인적 드문 곳을 찾아야겠다. 고 마음먹은 나는, non PvP 서버에서 잠깐 본 적 있는 바닷가 자리(오션뷰!)를 찾기위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원을 채집했다.

처음엔 화면과 음성에 노이즈가 생기는 게 뭔가 싶었는데, 인공가옥 부근에만 가면 노이즈가 발생한다는 관계성을 알아챘다. 그리고 북미 서버에서 노이즈에 오래 노출되면 방사능 피해를 입고 죽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화면 구석을 자세히 보니 방사능 수치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뭔가 치료제나 억제제 같은 걸 나중에 얻을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인공가옥들을 뒤지던 도중 트렁크 몇 개를 발견해 열어보던 중 알약 같은 것을 입수했다. 이름에 안티 방사능 뭐시기라고 써있는 걸로 보아 이게 그 약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남쪽으로 향하던 도중, 물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인공가옥 = 현대물품의 리젠 포인트, 그리고 인적이 드묾. 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그 근방에 큰 길에서 눈에 잘 안띄는 곳을 골라 셸터를 짓고 문을 설치한 뒤에 접속을 종료했다.

내일 접속하면 이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 3일 차

 

FireIn 서버 - 수집 그리고 수집

 

다행히 어제 종료했던 셸터 안에서 모든 캐릭터 정보가 유지된 채로 게임에 접속됐다. 살아남았다.

이 장소가 제법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런 저런 재료들을 수집하기로 마음먹고 스토리지 박스를 하나 만들어 셸터 안에 설치했다.

그리고 채집 여행을 하던 도중, 목재는 나무를 캐서 얻는 것보다 필드에 랜덤하게 생성되는 "적제된 목재"를 채집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도 배웠다. 게다가 처음으로 석재 채집도 해보는 행운까지 누렸다. 제법 멀리까지 나온 것 같아 돌아가려는데, 사람처럼 생긴 것들이 내 쪽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사람인가! 싶었지만 뭔가 다르다. 피부가 썩어있고 옷이 너덜너덜한 것이... 방사능 지역 부근을 배회하는 좀비였다.

다행히 상식적인 좀비였기 때문에 이동속도가 느린 편이었고, 전력질주를 통해 어느 정도 거리를 이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저 멀리서 계속 내 쪽으로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도망가야되나 싶기도 하고 한 번 싸워볼까 싶기도 해서, 손에 들고 있던 채집용 돌도끼로 좀비를 공격! 해보려했지만 한 대 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뭐가 이렇게 쎄........

그래도 거점을 지어뒀으니 그쪽으로 부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리스폰 대신 아래쪽의 "At a Camp"를 눌렀다.

으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 랜덤 로케이션에 리스폰되고 말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셸터는 세이브포인트의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이브포인트는 바로 침낭(Sleeping Bag)이었다!

침낭을 만들려면 뭘해야하나.. 보다보니 옷감을 잔뜩 구해야한단다. 옷감을 어디서 얻는지 채팅으로 물어보니 짐승을 사냥해야 한다고 했다.

난 사냥도구가 없는데....................

테크트리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나는, 일단은 자원을 축적하자고 마음 먹고 모으다가 죽고, 집 찾아 뛰어오고, 다시 모으다가 죽고, 또 뛰어오고를 수 차례 반복만 하다가 하루의 플레이를 마감하게 됐다. 그래도 이 자리로 뛰어오면 자원은 보존되어 있을 테니까.

 

 

- 4일 차

 

FireIn 서버 - 합류

접속해서 항상 그렇듯 내 셸터를 찾아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공장 굴뚝 같은 게 솟아있는 건물을 기준으로 내 집을 찾곤 했었는데, 아무래도 이 굴뚝 건물이 한 개가 아니었나보다.

급한데로 근처 바위 산 밑에 잘 안보이는 곳으로 거점을 잡고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물어서 알게 된 제련법을 통해 메탈과 설퍼 생산까지 가능해졌다. 덕분에 철도끼, 활, 리볼버까지 갖출 수 있게 됐으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주말 새벽에 딸 아이를 재워두고 꽤 오래 플레이한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리고 ModPat 님께 연락을 취해, 그룹 소유의 산성 위치를 듣고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어슴프레한 무렵에 열심히 열심히 이동해서 ModPat 님께서 마련해주신 셸터에 짐을 풀었다.

원래는 바위산 거점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둔 철문이 있었는데, 나무문을 철문으로 교체하려면 직접 나무문을 파괴하고 철문을 달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도끼로 나무문 200 번을 때리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그냥 가지고 있었다. 마침 가지고 있던 철문을 셸터에 달고, ModPat 님이 주신 나무 게이트를 입구에 박아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ModPat 님으로부터 이 산성을 손에 넣게 된 경위를 들었는데, 처음부터 이 건물은 이분들의 소유가 아니었다고 한다.

초기에 크게 세를 불리던 어떤 그룹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핍박 받으면서 유랑 생활을 계속하던 도중 우연찮게 그들의 본거지가 비었을 때 찾아내게 되서 출입구를 폭파시킨 뒤에 본인들의 출구를 새로 지어 건물 전체를 먹어버렸다고....

그리고 추가로 방사능 지역 좀비를 잡으면 리서치킷이라는 레시피를 얻을 수 있고, 그걸 통해서 계정-서버에 영구적으로 크래프팅 항목이 늘어난다는 사실과, 파운데이션, 필라, 실링 등의 건물 기반 골격은 파괴되지 않고 문과 벽만 파괴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 5일 차

 

FireIn 서버 - 권태

산성 보금자리 생활 이틀 째. 집단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룹원들과는 접속 시간대가 달라 만날 수가 없다.

건설 계획이라던가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함부로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차곡차곡 비축만 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외침이 어렵게 험준한 바위산 속에 자리를 틀은 거점이다보니, 정작 나부터가 집에 돌아갈 때 입구 찾는 게 너무 힘들다.. 활 쏘는 기술도 늘어서 이제 사슴 뿐 아니라 곰이나 늑대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게 됐다. 위급한 순간을 위해 총은 늘 아껴두고 있지만, 왠지 위급한 순간이 오면 총도 쏘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 불안함도 있어 조만간 좀비 사냥을 갈 때 써 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종일 나무/돌만 캐고 짐승들만 잡으려니 급격히 무료해진다.

 

 

- 6일 차

 

FireIn 서버 - 강도

산성 보금자리 생활 나흘 째. 무료함에 결국 하루 동안 러스트 섬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자서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좀비 사냥을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 밖을 나섰다.

가는 길에 돌이 있길래 채집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빨간 빛이 흔들거리나 싶더니 총성이 들려왔다.

'사람이다!'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버둥거리면서 도망치고 있었는데, 수 차례 격발되는 총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고 물어본다.

"웨얼 아 유 쁘롬?"

나는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KOR 이라고 타이핑을 하고 있는데, 측면에서 기관총 격발 소리와 함께 다량의 데미지를 입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와 똑같은 수법으로 그들에게 유린당했다.

잃어버린 무기와 화살/총알은 다시 만들면 된다. 치킨의 비축분도 충분하다.

다만, 계속해서 재정비하고 나가봤자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뭔가 혼자서는 해쳐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조용히 접속을 종료했다.

아쉽지만, 같이 할 동료를 구하기 전까지는 당분간 러스트 섬에 방문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동행이 없는 PvP 가능한 샌드박스는, 당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하다는 진실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

아래 포스팅은 GDF에 작성했던 내용을 옮긴 내용입니다.


원문 링크: http://gdf.inven.co.kr/viewtopic.php?f=14&t=375&p=1660#p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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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한 RP에 대해 정의해보기 이전에, 좀 더 하이 레벨 단계의 주제를 잠깐 꺼내볼까 합니다.

저는 (비디오 게임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종류의 게임이 가지는 목적은 "재미 추구"라고 생각합니다.

PC방에서 친구들과 LoL을 할 때,
방에서 PC로 와우를 할 때,
거실에서 부모님과 키넥트 어드벤쳐를 할 때,
동네 골목에서 고무줄 놀이를 할 때,
놀이터에서 숨바꼭질을 할 때.

모두 마찬가지로 "재미있으려고" 게임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문적으로 자본을 투자해서 더 큰 자본으로 불리려고 리니지 등을 하는 생활형 프로게이머들의 경우는 특수 케이스니 여기서 제외하고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RP 이야기에서 호모 루덴스("인간은 유희적 동물"이라는 관점에서 지칭하는 인류)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어떤 놀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면서 재미의 원류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대해 리마인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선 제가 RP라는 단어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의 핵심은 "캐릭터 전체의 역할 수행"이었습니다. tophet 님과 Nairrti 님께서 말씀해주셨던 TRPG에서 RP가 의미하던 "포지션"의 핵심 의미와 더불어, onzk777 님께서 "연기"로 지칭하셨던 의미, 그리고 Raoul 님의 "소셜 롤"을 모두 포함하는 더 큰 의미의 상위 개념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즉, 전투 역할과 직업, 성격, 지위 등을 모두 아우르는 캐릭터 그 자체에 대한 몰입을 RP라고 불러보고자 했습니다.

최초의 TRPG가 창궐한 시점에서, 플레이어들이 RPG라는 놀이를 시작한 이유는 바로 tophet 님과 Nairrti 님께서 설명해주신 원류로서의 "역할 분담을 통한 이야기 진행"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그것이 규모가 적어서 재미있었는데 지금의 MMORPG는 규모가 커져서 재미가 없다 또는 재미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이 아니라 "더 이상 역할 분담만으로는 재미를 주기 어려운 시기가 됐다"는 쪽으로 접근해보고자 했습니다.

onzk777: 애초에 토킹 게임인데 각자 상대 캐릭터의 깊이도 없고 하면 얘기거리도 없고 그저 주사위굴리고 던전크롤링하는게 다일건데 그건 이미 기존 게임에서 다 해먹었고요.

저는 본문의 대화 내용 중 onzk777 님께서 말씀해주신 저 부분이 포인트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역할 분담을 통한 게임 진행 자체는 이미 충분히 식상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기존 TRPG의 핵심 재미였던 역할 분담은 현재까지 고스란히 잘 계승되어 왔지만, 그 과정에서 유실된 다른 재미 요소들을 현대의 MMOG(반드시 RPG일 필요는 없습니다)로 가져오려면 어떤 것을 해볼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해본 결과, 개인적으로는 현대에 와서 "캐릭터 연기"로 분류되던 RP를 원 뜻과 재해석된 뜻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형태로 녹여내는 것은 어떨까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화록 아래 추가로 포스팅한 댓글의 내용이었던 "RPG가 플레이어의 RP를 해친다"는 의미는, 와우의 일일퀘스트가 매일 매일 퀘스트를 생성해주는 "흥미로운 컨텐츠"에서 순식간에 일일 필수 로동 할당량처럼 꺼려지지만 억지로 해야하는 "일감"으로 전락한 것과 매우 흡사한.. "강제받는 순간 재미는 급감한다"는 이치에서 출발한 내용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죠.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거라 생각하는데요,

이제 막 공부하려고 컴퓨터를 종료하고 있는데 방문을 열고 들어 온 엄마가 "넌 맨날 컴퓨터만 하니? 그만하고 공부 좀 해!" 라고 하면 공부하기 싫어지는 경험 입니다.

"tophet 님의 말"

Zerasion님의 RP를 시스템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플레이어들이 자율적으로 상호작용 - 특히 협력 - 하는 행위라고 해석한다면 그게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Zerasion님의 아이디어는 '시스템에 의해 빡빡하게 능력을 제한하고 반 강제로 협력을 유도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냥 내버려두면 플레이어들이 알아서 서로 협력하고 반목하면서 재미있게 잘 놀 수 있지 않을까'라는 걸로 보인다는 거지요.

tophet 님께서 정리해주신 많은 부분이 제 의도에 부합하긴 하지만, 반드시 협력에 해당하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TRPG를 "코옵"이라고 분류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다보니 그렇게 되긴 했지만... 마크와 RUST의 사례에서 제가 주목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였는데, 바로 "협력"과 "대립" 입니다. 자발적인 분업을 통한 협력이 강제하지 않아도 저절로 분류되는 일종의 클래스라고 생각했고, 또 하나는 시스템이 따로 제공하지 않아도 벌어지는 분란 행위에 주목했습니다.

일반적인 OnlineRPG에서 시스템이 정해주는 클래스와 적에 대한 정의를, PvE/PvP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자유롭고 자발적인 규칙들이 매우 합리적으로 생성/동작한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비취졌기 때문입니다.

"tophet 님의 말"

만일 예로 드신 마인크래프트에서 실제로 플레이어가 건물이나 지형을 만들 때 보너스를 받는 건설자, 자원을 채집할 때 보너스를 받는 노동자, 수리에 보너스를 받는 관리자 이 셋 중 하나의 클래스를 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TRPG에서 말하는 Role Playing에 해당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니죠.

이 부분에서는 RP에 대한 이야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꺼내놓아야 할 것 같은데요. 저는 보상 역시 마찬가지로 "보상을 받는 행위가 재미있기 때문에" 컨텐츠의 달성 시 보상이 지급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컨텐츠의 달성보다 보상 자체가 목적이 되게 되는 경우로 주객이 전도되어 갔다는 부분에서 현재의 보상 체계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심각한 결함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나쁘게 발전된 예로는, 컨텐츠는 플레이어로부터 시간을 뺏는 도구이며, 그와 같은 일종의 시련을 극복한 뒤에 얻는 보상만이 유일한 재미(실제로는 이조차도 단순한 일감으로 여겨지는)로 인지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tophet 님 인용부분에서 설명해주신 부분은, 시스템 상의 보상이 존재하고 플레이어는 그와 같은 보상을 따라 움직이게 되면서 role-play가 발생하게 된다고 이해하고 있는데요. 저는 이 부분도 마찬가지로, 오히려 플레이어의 자발적인 동기를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예로는, 예쁜 블러드 엘프 마법사를 하고 싶었던 와우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그는 굉장히 효율추구적인 플레이어였고, 때문에 "가속 +1%"라는 종족특성의 유용함 때문에 울면서 억지로 고블린 마법사를 선택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썩 마음에 드는 예시는 아니지만 LoL의 예를 들어 보면, 애초에 수많은 영웅들에게게 부여된 클래스라는 것은 없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운용하는 탑/미드/바텀/정글/서폿이라는 롤이 존재할 뿐이며, 이 조차도 플레이어의 운용력에 따라 영웅의 제약을 초월해 사용하거나, 축구/농구 등에서 유동적으로 포지션/포메이션이 바뀌는 것처럼 상황에 맞게 그 롤을 스위칭하거나 지원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포럼과 블로그를 통해 소개해드렸던 리니지 이야기 "땅 위의 왕, 땅 아래의 왕"의 사례에서도 보면, 클래스로 제공되는 기사, 요정, 군주 등의 구분 외에도 플레이어들은 상황에 따라 용병, 문지기, 호위병 등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부분이 Raoul 님께서 말씀하셨던 소셜 룰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ㅠ)


제가 본래 샌드박스형 또는 자유도형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와우에서 방어형 공격형 회복형의 구분이 없던 오리지널 시절(탱딜힐의 명확한 시스템 상의 구분은 리치왕의 분노 확장팩에서 랜덤 파티 매칭 시스템이 추가되면서 생김. 그 이전에는 플레이어들의 개념 상에서만 존재) 특성도 어중간하고 클래스 구성도 어중간한 파티원들이 모여서 실패도 하고 토론과 궁리도 하면서 "함께" (누가 혼자 시켜서 끌고가는 것이 아닌 진정한 함께)클리어해나가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이 스킬을 쓰라고 해서, 남들이 이 특성을 찍으라고 해서, 남들이 이 클래스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하는 게임이 재미있을 리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것을, 우리는 보통 게임이라는 말 대신 "일"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이 플레이하는 캐릭터를 이해하고 운용할 때에, 비로소 몰입이 가능하고, 그 순간 억지로 인지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연스럽게 RP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

 

아래 포스팅은 GDF에 작성했던 내용을 옮긴 내용입니다.


원문 링크: http://gdf.inven.co.kr/viewtopic.php?f=14&t=375&p=1653#p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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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최근 주목하면서 플레이하고 있는 RUST를 볼 때 떠올렸던 몇 가지 생각들이 있었는데, 이 대화의 끝에서 관련된 내용이 머릿 속에서 어느 정도 구체화 된 것 같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제가 떠올린 생각의 가장 큰 주제는 바로, "RPG가 오히려 RP를 해친다"는 것입니다.

1 세대 온라인 게임들이 보여줬던 가상 세계형 구조, 그 중에서도 얼마 전 포럼에도 올라왔던 시뮬레이션의 꿈과 같은 내용들의 공통점은 바로 "큰 규칙의 틀을 제공하되 제약을 강하게 두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본문의 대화 도중에 RP의 R(Role)이 의미하는 것이 "캐릭터"냐 아니면 그 캐릭터가 지금 위치한 "포지션"이냐 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그 포지션과 같은 세부 규칙들이 점차 세분화되면서 오히려 플레이어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로 인해 역할에 자연스럽게 몰입하는 것이 아닌 등떠밀려서 숙제하듯 강제받는 느낌이 들 수 있다고 봅니다.

얼마 전에 Voosco 님과 함께 neoocean 님께 들었던 마인크래프트 대규모 프로젝트의 일화라거나, 요즘 modpat88 님께서 들려주시는 러스트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세계의 기본 규칙만 존재하고 플레이어의 캐릭터를 강제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더 활발하게 RP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례들을 간략하게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neoocean 님의 사례)

예전에 마인크래프트에서 크리에이티브 모드가 아닌 서바이벌 모드로 커다란 환경을 재현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규모가 컸기 때문에 다수의 인력이 동원되야했는데, 업무 분담을 위해 자연스럽게 세 부류로 구분이 됐다.

1. 건설자 군: 의도된 건물이나 지형을 실제로 만들어가는 사람들

2. 노동자 군: 건설자들이 건설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 채집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

3. 도로관리자 군: 노동자들이 채집한 자원이 건설 현장까지 운반될 수 있도록 선로를 만들어서 카트에 담아 이동하게 되는데, 그 도로가 손상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사람들

이 중 나는 노동자 군에 해당됐었는데, 가끔 카트에 직접타고 현장을 빙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modpat88 님의 사례 #1)

 

러스트를 하다보면 유저들을 크게 두 분류, 좀 더 나누면 네 분류로 나눌 수 있음.

1. 농부/목공 - 하나하나 재료수집하고 집지어서 자신의 재산과 영토를 지키려는 부류

2. 커뮤니케이터 - 무조건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하며 처음 시작한다고 하면 자신들의 아지트로 오라고해서 세력을 불려나가는 사람, 진짜 무서운 인간들

3. 밴딧 - 한탕을 노리는 인간들, 자고 있는 플레이어나 어둠속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사람들을 사냥하고 그들이 모아둔 모든걸 가로챔

대망의 4번, 사이코패스 - 조커같은 스타일, 계속 서버를 옮겨 다니면서 뒷통수에 뒷통수를 계속 치고 그룹이고 뭐고 필요없이 모두 혼자 독차지하려고 함

4번이 진짜 무서운게... 이 부류들은 1~3번인척 연기를 계속 하다가 사람들이 안심하는 그 순간 뒷통수를 침, 그렇다고 그걸 지가 쌓아서 재산화 하는게 아니라 그냥 파괴함. 그냥 남들이 괴로워하는걸 즐기는 부류

 

 

modpat88 님의 사례 #2)

 

어제 레알 진기한 현상을 봄.

생판모르는 사람들 끼리 총이랑 바지 하나 입혀서 들판에 세워놨는데 자기들끼리 그룹을 이루고 자기들 재산 지키려고 거대한 창고 만들고...

자기들끼리 컨트롤이랑 과시를 위해 콜로세움을 건설하고 토너먼트하고 거기서 이긴사람한태 제일 부유하고 강한 놈이 상품 주고 수상소감 발표하고...

이 모든 게 15명 있는 서버에서 10명이 벌인 일.

그럼 5명이 뭐했느냐.
그 사람들 토너먼트한다고 할 때 몰래 걔들 집 털러가서 다 털어옴. 오늘 출근하기 전에 들어가보니 싹 다 털렸다고 범인들 찾고있는데...

내 예상엔 20명 최대인원인 서버에서 진영나눠서 전쟁일어날거 같음

꼭 기획자라서가 아니라 이런 현상에 관심이 많아서 기대하는 중임. 참고로 몇몇 서버는 물물거래를 초월한 주식/투자/부동산땅투기/조폭짓 까지함  ... 북미서버는 투표도한다고 하고.. 또 투표한다고 사람들 irc 채팅하고 있는데 어떤 놈들이 제일 견고한 요새를 그 사이에 점령(무장봉기)ㅋㅋㅋ

울티마하던 사람들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위 사례들에서 보시다시피, 시스템이 어떤 롤을 강제하지 않고 룰만 쥐어주는 샌드박스 쪽이, 오히려 세세한 규칙들과 미리 준비된 역할이 마련된 RPG보다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플레이어들이 RP할 수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듯, 그야말로 "코스프레"와 같은 연기력을 요구하는 개념의 RP가 아니라, 플레이어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행하는 그 자체가 바로 RP가 되는 쪽이 더 강력한 RP라고 생각합니다.

클래스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던 울티마 온라인이 그랬고, 또한 한국의 울온이라고 불리는 마비노기에서도 검증된 것처럼, 충분한 바탕을 구성하고 오히려 제약을 없애게 되면 오히려 플레이어들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RP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따라서 너무 세세하게 규정된 RPG의 Role이, 오히려 플레이어의 RP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게 이 글의 요지였습니다.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

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최고의 게임은 어떤 게임인가요?", "당신의 인생 게임은?", "추천할만한 게임을 꼽는다면?" 같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나의 20 년 넘는 게이머 인생에서 어찌 몇 가지 게임만 꼽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그러다 문득, 다른 분들이 종종 사용하는 "나만의 GOTY(Game of the year. 올해의 게임)"라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내 인생의 GOTY들은 어떤 게임이 있을지 정리해보면 적어도 해수만큼의 게임은 추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 정리를 시작해 보았다.

올해로 이제 우리 나이로 서른 한 살이 됐고, 게이머로서의 삶을 살아온 지도 어느덧 25 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어찌보면 한 게이머 개인의 기록일 수도 있겠지만, 격동의 패러다임 변화를 몸소 겪으며 살아온 20 ~ 21 세기 게이머라는 부분에서 그 어떤 시대의 흐름이나마 캐치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작은 희망도 가져본다.

 

※ 개인적인 GOTY 이므로, 게임 발매일과 무관하게 플레이한 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음.

 

 

1984 ~ 1988 - (너무 어려서 GOTY 랄만한 게임 경험이 없음. 테트리스나 벽돌깨기 등이 있었으나 워낙 시리즈가 많아 정확한 작품 정보를 찾기 어려움.)

 

 

지금까지 약 24 년 간의 개인적인 역대 GOTY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대략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1) 가정용 콘솔 게임에서 PC 패키지 게임으로의 변화

2) 리듬액션으로 저변이 확대된 아케이드 센터의 부흥

3) 콘솔 게임의 발전과 PC 게임의 온라인화

4) 포터블 게임기의 발전과 PC 인디 게임의 약진

5) 나를 키운 건 8할이 블리자드 였다(....)

와 같은 큰 흐름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모바일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도 언급될 필요성은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모바일 플랫폼에서는 GOTY 급 게임 경험을 개인적으로는 느껴보지 못한 탓에 본 글에서는 다루지 못하게 된 것 같아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이 같은 격동의 게임 시대를 직접 살아온 세대로서, 이 같은 경험들에 대한 공유가 좀 더 많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끝으로 my GOTY를 마쳐볼까 한다.

 

 

-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게이머 인생에서의 GOTY에는 어떤 게임들이 꼽힐 지 궁금한, Zerasion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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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

 

아래 포스팅은 GDF에 작성했던 내용을 옮긴 내용입니다.


원문 링크: http://gdf.inven.co.kr/viewtopic.php?f=14&t=358&p=1594#p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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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anley Parable 리뷰를 끝내고 짧게나마 Gone Home을 리뷰해볼까 했는데 이미 tophet 님께서 테잎을 끊어주신 덕에 저는 숟가락만 얹어보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저는 트위터에서 곤홈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었습니다.

곤 홈(Gone Home) 클리어.


민감한 소재를 정면으로 다뤘다는 점과 집이라는 익숙한 배경을 소재로 어둠과 고립과 고독을 통해 플레이어를 집중시키는 점, 음악과 나레이션의 청감각이 메인라는 점이 멋지지만, "게임"으로 보면 "투더문"의 연장선.

일단 곤홈은 간략하게 "3D 투더문"같은 느낌이라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 크게 주목할만한 매커니즘은 없어보이지만, "전달 도구로서 게임을 선택한 점"이라는 것과 "이야기의 주제"가 이슈를 불러일으킬만한 점은 확실히 인정한다. 상당히 인상적이고 감동적임.

일단 스탠리와 곤홈은 "동일 장르를 표방하지만 양 극단에 선 작품"의 느낌이다.

 

이미 본문에서 tophet 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곤홈은 매커니즘 측면에서는 전무하다시피할만큼 게임 디자인 요소가 없습니다.

다만 굳이 게임을 선택한 점과, 그렇다면 게임이라는 전달 도구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얼마나 활용했느냐라는 점에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전달력을 높였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제 트윗 인용에서 보시다시피, 곤홈이 다루는 주제는 상당히 민감한 사안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 주제에 대해 꽤 이슈가 됐었고, 여전히 논란을 낳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런 민감하고 반감을 충분히 살만한 주제를 게임이라는 도구로 어떻게 풀어냈느냐라는 부분에서, "굳이 게임을 전달 도구로 사용했으면, 보다 게임스럽게 풀어냈어야지"라는 기존의 많은 기조와는 달리, 오히려 거꾸로 가듯이 "더더욱 영화적인 서사 전달 방식"을 차용하고 있는 게 제법 흥미로웠습니다.

영화적 연출을 사용한 숱한 게임들의 스토리텔링에게, "이럴 거면 차라리 영화를 보지!"라는 혹평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게임이 영화와 차별되는 근본적인 키포인트인 "직접 한다"는 부분만을 전적으로 사용한 것이 제게는 묘하게 정제됐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제작자는 서사의 주인공(화자)인 여동생 사만다(샘)를 게임의 주인공 캐릭터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게임이 가지는 "직접 한다"와 "화자에게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강력한 장치가 됐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반감을 충분히 살 수도 있을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곤홈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사만다를 주인공으로 했다면, 세간에서 비욘드 투 소울이 이해도 안되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만들어놔서 몰입이 안된다는 평을 들었던 것과 유사한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곤홈은 그래서, 서사의 주인공은 여동생인 사만다이지만, 플레이어는 가족 내에서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인 언니 케이틀린(케이티)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조도 부인도 하지 않는, 아군도 적군도 아닌 제 3자의 케이틀린이야말로,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이제부터 알아가야하는 플레이어가 몰입하기 적절한 캐릭터였을 겁니다.

제가 곤홈을 3D 투더문으로 평가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첫번째는 정해진 스토리를 그저 감상만하는 선형 스토리텔링 드라마라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바로 "주인공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입장"이라는 점입니다.

본문의 제목에도 쓰여있다시피, 곤홈은 장기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집안의 장녀가 텅 빈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을, 동생의 일기를 읽어주는 "독백 재생"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게임의 진도가 진행될수록 적당한 시기에 알아서 어디선가 재생되는 동생의 일기 낭송은, 처음에는 상당히 당혹스럽습니다. 플레이어가 집을 조사하면서 찾아낸 메모나 서류의 내용도 아니고, 플레이어로서는 사실 현 시점에서 전혀 알 수 없는 일기의 내용을 읽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곤홈의 큰 영화적 연출의 차용점임과 동시에, 엔딩을 보기 전까지는 상당히 나쁜 게임 연출 디자인으로 여겨지게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단점으로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플레이어의 추적 행동과는 전혀 무관하게 겉도는 평행선의 느낌으로 일기 낭송이 진행되는 기분이 든다는 점입니다.

다만 플레이어가 찾아낸 어떤 흔적과 관련된 일기의 내용이 재생된다는 점이, 그나마 실낱같은 연관성을 겨우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이 일기는 어디서 읽히고 있는거야?"라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의문증은 게임의 라스트 씬에 가서야 겨우 밝혀집니다. 그러고나면 비로소 "아 이게 이런 식의 연출이었군"하는 추정은 됩니다만, 사실 그 때까지 진행하는 내내 찜찜했던 기분이 완전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죠.

살짝 스포일링을 하자면, 플레이어는 게임의 마지막 단계에서 동생의 은밀한 공간에 도착하게 되고, 그 곳에 펼쳐져있는 동생의 일기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 일기를 동생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언니가 읽고 있었던 거고, 게임의 시작과 끝은 사실상 전체가 회상씬에 가깝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앞서 설명드렸던 "더더욱 영화적 연출의 차용"이라는 부분은, 바로 이 회상 씬 전체에 덧씌워진 화자의 나레이션이라는 연출을 이야기드리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둠과 고립과 고독은 망상의 여유와 시계를 제한시키고, 차분하게 시각 정보 이외의 것들에 집중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이 게임이 메인으로 내세우는 감각 요소인 "청각"이 최대의 효과를 발현하게 됩니다.

곤홈은 온전히 소리에 집중하게 만들어진 어두운 무대에서 누군가가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것과 흡사한 분위기를 가집니다.

게임은 철저하게 제어된 동선을 따라 진행되며, 그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일기의 내용을 밝혀가게 됩니다. 일기를 읽어준다는 이야기의 메인 스트림과 함께, 곳곳에서 발견되는 동생의 일화와 관련된 카세트 테잎과 테잎이 있는 곳에는 항상 존재하는 카세트 플레이어.

일기를 읽어내려가는 동생의 목소리와 그 일기가 기록될 즈음에 연관된 카세트의 음악이, 동생이 그 당시에 느꼈을 심리 상태를 간접적으로 공감하게 하면서 조금씩 이야기에 몰입도를 더해갑니다.

그리고 곤홈의 이야기는 반전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중반에 가면 거의 확실시 되고, 심지어 초반부터 쉽게 짐작할 수 있기도 합니다.
커다란 서사구조를 가지는 일반적인 스토리 중심의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보다, 곤홈의 이야기는 동생의 심리상태가 시간에따라 변화해가는 내용을, 그리고 그에 따라 플레이어가 조금씩 동생을 이해하고 마침내 공감할 수 있게 이끌어가는 장치들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곤홈의 스토리텔링이 투더문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대단한 점을 가진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른 화자의 심리 상태 변화 흐름"을 정말 섬세하게 깔아놓았던 데다, 이를 플레이어가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적절히 이끌어주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그 주제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이라 결말을 수용하고 동감하는데에 성공적이었던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공감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 정도로 전달했다는 점만큼은 분명 멋진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가지고 놀 수 있는 게임성이라는 부분의 부재와, 시나리오 상의 한계로 인한 일회성 플레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짧은 볼륨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세일 기간이 아니면 다소 부담되는 가격 책정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Gone Home Steam Page:  http://store.steampowered.com/app/232430/?snr=1_7_15__13

Gone Home 공식 팬 번역: http://st135.tistory.com/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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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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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anley Parable

 

MAN vs STORY, 끌려갈 것인가 끌고갈 것인가?

 

 

 

0. 들어가기에 앞서..

마 전, 지인으로부터 낯 선 이름의 게임 하나를 추천받게 됐다. 우선 이 게임의 플레이 소감부터 짤막하게 말하자면,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을 해보자면, 적어도 내가 판단한 이 게임은 "게이머에게 게임을 한다는 것, 디자이너에게 게임을 만든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넘어, '과연 게임이란 게 뭐라고 생각해?' 라는 질문을 게임이 하고 있는 게임"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과연 내가 이 게임을 감히 리뷰해도 되는 걸까?" 라는 의문과 "이 게임에 대한 최고의 리뷰는 '닥치고 그냥 해보세요!(Shut up and Play now!)'가 아닐까?"라는 의문이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 게임은 바로 이제부터 소개할 "스탠리 우화(The Stanley Parable)"다.

글 실력도 리뷰 경력도 별로 없는 초보 게임 디자이너가 지금부터 오르지 못할 하늘을 쳐다보고 바벨탑을 쌓아올려볼까 한다.

 

(PS1. 게임의 특성 상 리뷰 자체가 스포일이 될 수 있으므로 플레이할 계획이 있는 분 중에 스포일을 피하고 싶으신 분은 플레이 하신 뒤에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PS2. 스포일을 최대한 줄여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최대한 스크린샷의 첨부를 아끼고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절대로 제가 스샷을 찍어 넣기 귀찮아서가 아닙니다. Trust me.)

 

 

1. 첫인상

사전에 소개해 준 지인에게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채, 그저 스팀에서 판다는 이야기만 듣고 정보를 얻기 위해 데모(Demo) 버전을 먼저 플레이해봤다.

비록 영어라 정확한 내용 이해는 불가능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독창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데모 버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GUI로 해결했을 법한 여러가지 장치들을 레벨디자인으로 표현해냈다는 점이었고, 그 참신함만으로도 이 게임의 본편을 플레이해보고 싶다는 열망과 호기심의 방아쇠를 당기기에는 충분했었다.

첨언하자면, 데모 플레이와 본편 플레이는 전혀 다른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으므로 본편만 해본 분이라면 한 번쯤 데모 버전을 플레이해보는 것도 유익한 경험일 것이다.

 

< 스탠리 우화 메인 메뉴 화면. 액자식 구성이 인상적이다. >

 

위 그림에서 보다시피 스탠리 우화는 시작화면부터 범상치 않은 인상을 풍긴다. 그림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실제 마우스 포인터의 이동이나 메뉴의 이동까지도 화면 속의 모니터 속의 모니터 속의 모니터에까지 반영되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선하다.

내가 이 장면을 보고 문득 떠올린 영화는 고전 명작인 매트릭스(MATRIX)였다. 하지만 그 연상이 결코 개연성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게임을 시작하면 오프닝 시네마틱이 재생되면서부터 바로 알게되는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는 "스탠리(Stanley)"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한 때 매트릭스의 일부였던 앤더슨이었던 것처럼, 스탠리는 기계 부품처럼 근무하는 한 명의 화이트 칼라 사무직 노동자다. 그리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거나 아니면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계획처럼, 트리니티와 모피어스를 만난 앤더슨의 일상이 파괴된 것과 무척이나 닮은 낯 선 상황에 마주치게 된다.

 

 

< 스탠리 우화 시작 지점. 배경은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스탠리의 사무실이다. >

 

2. 스토리텔러와 인터랙션 플레이의 양립

스탠리 우화는 스탠리의 사무실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1인칭 스탠리의 시점의 게임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스탠리는 갑자기 중단된 업무 지시에 이상함을 느끼고 방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사무실의 모든 직원이 사라져버린 희안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스탠리 또는 플레이어에게, 어쩌면 둘 모두에게 설명해주는 스토리텔러의 나레이션을 따라 스탠리와 플레이어는 사무실 모험(Adventure)을 떠나게 된다.

스탠리 우화는 이같은 "인터랙트 드라마"로 불리는 장르들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전체적인 흐름도 그러한 지시를 따라가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방금 전에 굳이 괄호를 써가면서까지 강조한 것처럼, 개인적으로는 이 게임을 "1인칭 어드벤쳐"장르로 보는 것이 더 알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GDF(gdf.inven.co.kr)에서 한 차례 논의된 바 있는 인터랙트 드라마와 어드벤쳐의 차이는 "[대화] 스토리텔링 게임의 현재"에서 볼 수 있듯이 "선택과 그에 따른 체감" 여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단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인터랙트 드라마는 투 더 문(To the Moon)이나 곤 홈(gone home)과 같은 선형 구조로 이뤄져 플레이어가 정해진 이야기를 끊임없이 따라가는 "게임의 형식을 띤 소설 또는 영화"에 가까울 것이다. 이 때에 사용된 인터랙트는 "사용자가 직접 게임 세계에서 무언가를 조작하고 그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는" 의미로 해석되며 샌드박스류에서 사용하는 "인터랙션"과는 차이가 있다. 마치 "다음" 버튼을 누르면 다음 페이지가 재생되는 e-Book을 보는데, 그 다음 버튼을 누르는 행위가 좀 더 복잡하게 설계된 느낌과 유사하다. 이는 분명 게임이라는 능동적인 매체의 장점을 통해 이야기의 전달력을 강화한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게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다른 매체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고유한 장치의 활용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정의는 결코 인터랙트 드라마 또는 선형 스토리텔링 게임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정해진 이야기를 선택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입장에 대한 표현이다. 인터랙트 드라마는 대개 플레이어의 선택이 게임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게임을 어드벤쳐로 보고자 하는 이유가 "선택과 그에 따른 체감"이라는 점에서, "스탠리 우화는 플레이어의 선택이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어드벤쳐 게임에서 이런 플레이 경험을 충분히 제공해줬기 때문에 "스탠리 우화가 어드벤쳐 장르니까 플레이어의 선택이 유의미하게 동작하는구나"라는 부분은 받아들이는 데 큰 무리가 없다. 문제는 문단의 시작에서 잠시 언급된 "스토리텔러"의 존재다.

스토리텔러가 존재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정해진 스토리가 있고 그 스토리를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정해진 이야기가 있는데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의 진행이 바뀐다면? 뭔가 논리에 문제가 생기는 기분이다. 정해져있다는 건 바뀔 수 없다는 이야기인데, 선택에 따라 바뀐다는 건, "안바뀌는 건데 바뀌어"처럼 말도 안되는 소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스탠리 우화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해보았다.

 

< 어린 시절 한 번쯤 봤을 게임북 / 출처: 네이버 블로그(Link) >

 

그것은 바로 "게임북" 이다.

게임북은 위 그림의 하단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선택의 경우에 대해 이미 책 전체에 다 그려져 있고 독자는 선택에 따라 지정된 페이지로 이동하는 식으로 책을 읽어나간다. 1 page 에서 시작해 한 장씩 장을 넘기며 끝 페이지까지 진행하는 것을 선형 진행으로, 이처럼 필요에 따라 임의의 페이지로 이동하는 것을 비선형 진행으로 놓고 본다면 "스토리텔러와 인터랙션 플레이의 양립"이라는 낯 선 개념이 훨씬 쉽게 이해될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 스탠리 우화의 스토리텔러는 "플레이어의 선택을 읽어주는 존재"인 것이다. 게임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어느 페이지를 펼친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것을 기본으로해서, 심지어 펼치지 않았던 곳에서 대략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 것인지까지도 읽어준다. 플레이어가 선택을 하도록 읽어주든, 아니면 플레이어가 이미 내린 선택을 읽어주든, 이러한 게임북같은 방식을 통해 선택과 스토리텔링이 반복되는 것이 스탠리 우화가 제공하는 플레이 경험의 중심이다.

 

 

3. 치열한 선택 싸움

게임북이 아닌 전자 게임에서 인터랙션 플레이와 스토리텔링이 결합된 예시를 쉽게 떠올려보자면, "멀티 엔딩을 지원하는 비주얼 노블"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20~30 대의 남성 게이머라면 흔히 알고있을 법한 Leaf 사의 투하트 등이 대표적인 예시 게임인 바로 그 장르 말이다. (Elf 사의 다른 게임들은 대체로 연애시뮬레이션으로 분류되니 그 것은 모두의 마음 속에 고이 넣어두도록 하자.)

하지만 이런 비주얼 노블은 동등한 조건들을 나열해놓고 취향에 따라 선택하거나(공략 캐릭터 선택), 정답이 정해져 있는 다항 객관식 문제를 선택하거나(시간에 맞춰 이벤트 장소를 찾아가는 선택) 하는 선택이기 때문에, 전자의 선택은 그야말로 무엇을 골라도 의미가 없고, 후자의 선택은 정답이 아니면 실패해버리기 때문에 이 또한 의미가 없다.

아는 분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게임 기획 실패 사례"라는 시리즈 중에도 선택에 대한 비슷한 구절이 있어 잠시 인용해보겠다.

경우의 수가 자유도가 아니라는 웃긴사례를 언급해 보겠다. 어떤 마을에서 물약을 팔고 있었다. 여기서 유저는 5가지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그렇다면 자유도가 있는 컨텐츠일까? 보기는 다음과 같다.

 

a) 초급 힐링포션을 100골드에 산다.

b) 초급 힐링포션을 200골드에 산다.

c) 초급 힐링포션을 300골드에 산다.

d) 초급 힐링포션을 400골드에 산다.

e) 초급 힐링포션을 500골드에 산다.

 

조건 : a~e NPC 는 같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힐링포션은 100% 똑같다.

 

여기서 유저는 5가지 "경우의 수" 중 하나를 선택할수 있지만 자유도는 없다고 할수 있다. 똑같은 힐링포션을 100원주고 살수 있는데 비싼값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위의 힐링포션을 구입하는 상황은 자유도가 없다고 할수 있다.

 

- 출처: 블로그 '나의 게임 개발 회고록', 기획실패사례: 자유도가 높은 기획 중.

(http://blog.daum.net/gdocument/185)

 

스탠리 우화 비교적 높은 자유도를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의 폭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들이 어떻게 의미 있는 인터랙션 플레이로 동작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게임은 겉보기에 스탠리의 일화를 그린 흔한 주인공의 일대기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그 내면에서는 스토리텔러와 스탠리를 조종하는 플레이어라는 "두 남자의 치열한 머리 싸움"을 그리고 있다(스탠리의 성별이 남자이므로 실제 플레이어 성별과 무관하게 두 남자로 설명함). 이 게임의 등장인물은 총 세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서 말한 스토리텔러, 스탠리, 그리고 그 둘의 싸움을 관조하는 의문의 여성이 그들이다. 이 게임은 사실 두 남자의 자존심 싸움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한심하다는 듯한 여성의 나레이션이 게임 내에 실제로 존재하기도 한다.

따라서 기획 실패의 인용 사례나 비주얼 노블과는 다른, 동등한 조건의 선택지가 지속적으로 제공된다는 점과, 그 선택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게 된다는 점이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이 의미있게 반영되는 큰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남자의 심리전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선택지는 항상 아래의 규칙을 따른다.

 

1) 순응: 스토리텔러의 지시대로 진행한다. (스토리텔러의 승리)

2) 저항: 스토리텔러의 지시와 반대로 진행한다. (스탠리를 조종하는 플레이어의 승리)

3) 무반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무승부. 지시거부로 스토리텔러에게 저항할 수 있지만, 플레이어가 얻을 수 있는 변화도 없다.)

여기서 진행이 불가능한 세 번째 무반응을 제외하면, 게임이 진행되는 내내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따라서 이 게임은 끊임없는 2지선다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인 분기는 크게 여러 갈래로 갈리지만, 매 순간 순간의 선택지는 항상 두 가지로 일관되게 제공된다. 그리고 그러한 끝없는 두 갈래 길의 미로와 같이 펼쳐진 선택들의 흐름은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져 이야기의 흐름을 급격히 바꿔나간다. 그리고 이것은 플레이할 때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스탠리 우화가 보여주는 최고의 인터랙션 스토리텔링이다.

이것이 이 리뷰의 제목이자 스탠리 우화의 핵심적인 풀이 방식인 스토리 주도권의 전쟁, "MAN vs STORY"의 실체다.

 

 

< 자꾸만 자신을 거부하는 플레이어(스탠리)를 어떻게든 자신의 스토리로 이끌고야 말겠다는 스토리텔러의 강려크한 의지의 발현.jpg >

 

 

4. 선택을 보다 의미있게 만드는 장치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야기한대로, 스탠리 우화의 인터랙션은 "선택"을 통해 발생한다. 이 게임에서는 위에서 말한 "선택 = 두 남자의 자존심 대결"이라는 은유적인 의미 부여 외에도, 직접적으로 선택을 보다 의미있게 만드는 게임 디자인적 장치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고, 또한 멋지게 동작하고 있다. 이번에는 이런 디자인 요소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강력한 피드백

모든 종류의 선택은 반드시 거기 따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결과라고도 부르지만, 작용에 의한 반작용으로 부르기도, 혹은 어떤 행동에 대한 피드백이라고도 부른다. 문학은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림과 음악은 각각 시각과 청각을 이용해 직접적인 감정을 자극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이야기와 시청각 효과를 버무려 복합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단방향적인 흐름에 피드백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피드백. 피드백은 플레이어의 행동이 게임에 개입되고,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응답하는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인터랙션은, 앞서 언급한 다른 매체들에서는 볼 수 없는 게임이 가지는 가장 큰 무기일 것이다. 그리고 피드백은 바로 그 인터랙션의 가장 큰 증거이기도 하다.

스탠리 우화는 바로 이 선택에 대한 피드백이 상당히 강력하게 제공된다.

일반 선형 스토리텔링 게임처럼, 스토리텔러의 지시를 따라 끝까지 진행하면 "Beat the game"이라는 업적을 달성하게 되면서 상당히 무난한 엔딩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별다른 "피드백"이라는 요소가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그림(스탠리 패러블 어드벤쳐 라인 tm)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저항의 선택을 하게되면 이를 어떻게든 제어하려는 스토리텔러의 의지에 의해 세계가 급변하게 된다. 그러면서 급기야 게임의 룰을 파괴해가면서까지 플레이어를 또다른 선택으로 몰아넣는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세계가 바뀌고, 바뀐 세계에 의해 다시 플레이어의 플레이가 변화하게 되는 아름다운 인터랙션은, 바로 이 저항 선택지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저항 루트 선택의 1차적인 피드백은 스토리텔러의 부정적인 반응에서 나타나고, 이런 종류의 선택이 누적되면 2차적으로 게임의 흐름이 바뀌면서, 종국에는 엔딩까지도 모두 바뀌어버리는 장치들은 스탠리 우화의 피드백이 주는 훌륭한 플레이 경험이다.

 

2) 번복 불가

많은 선형 게임들이나  FPS에서 디자인 또는 기술 상의 이슈로 이미 지나간 스테이지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스테이지 구분이 명확한 경우엔 이전 스테이지로 진행하는 루트가 원천 봉쇄되거나, 방 형식인 경우 도어를 차단해 퇴로를 막아버리는 경우를 여타 게임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스탠리 우화도 마찬가지로 선택을 번복할 수 없도록 들어온 방 문을 닫아버리거나, 아니면 A라는 버튼을 누른 뒤에는 B라는 버튼을 누를 수 없게 만드는 등의 번복 방지 장치가 계속해서 사용된다. 이는 방금 말한 디자인 또는 기술 상의 예기치 못한 이슈를 방지하는 적절한 방법임과 동시에, 선택의 무게를 더해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게 만드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불러올 수 있다.

 

 

5. 롤플레잉의 금기, 메타 게이밍

초반에 스탠리 우화를 1인칭 어드벤쳐 장르에 가깝다고 표현했었는데, 사실 이야기를 진행하다보면 전투와 성장이라는 최근 RPG라는 상징성과는 다른, 고전적인 역할 놀이라는 측면에서의 RPG라는 것을 알게 된다.

최근에 배우게 된 롤플레잉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는 "메타 게이밍(Meta-gaming)"이라는 것이 있다.

쉽게 예를 들자면, RP(롤플레잉)서버에서 MMORPG를 플레이할 때는 모두 각자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RP의 룰이기 때문에, 와우를 하면서 뜬금없이 "아, SBS에서 상속자들 할 시간이다. 가서 TV보고 와야지" 같은 게임 바깥 세계의 이야기를 언급해서는 안된다는 모종의 규칙이 있다. 게임 바깥의 것들을 게임으로 가져오는 행위를 메타 게이밍이라고 부르면서 일종의 나쁜 행위로 규정짓고 있는데, 스탠리 우화는 이 메타 게이밍을 게임 스스로가 하고 있다.

초반에 '과연 게임이란 게 뭐라고 생각해?' 라는 질문을 게임이 하고 있는 게임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은, 바로 스탠리 우화의 이 메타 게이밍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모 버전에서는 스토리텔러가 원래 준비된 엔딩 씬을 찾지 못하겠다며 허름한 공간에서 "자 이게 엔딩이야"라고 설명한 다음, "엔딩.. 엔딩이 어디갔지? 엔딩 보신 분?" 같은 대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본편의 스토리텔러는 자꾸만 자신의 지시를 거부하는 스탠리가 스탠리가 아닌 그를 조종하는 게임 바깥 세계의 "플레이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사실 1. ~ 4. 까지의 내용만으로도 스탠리 우화는 충분히 잘만들어진 비선형 인터랙션 스토리텔링 게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아이폰이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혁신"이라는 표현을 듣지 못하는 것처럼, 처음에 말했던 "충격"이라는 표현까지 쓰기에는 과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탠리 우화가 게이머와 게임 디자이너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강력한 메시지, 즉 게임이 스스로 메타 게이밍이라는 룰 브레이킹을 통해 게임을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개인적으로는 근래에 느껴본 적 없던 충격 그 자체였다.

 

 

< 말을 안듣는 플레이어에게 스토리텔러가 보여주는 "선택에 대한 교육용 시청각 자료". 선택의 의미가 이처럼 큰 게임이, 선택이 의미 없으니 제발 시키는대로나 하라는 걸 직접 가르치고 있다. >

 

스탠리 우화의 역설은 거시적으로 메타 게이밍으로 게임의 정의하기도 하지만, 미시적으로는 롤플레잉을 파괴해서 롤플레잉을 "교육"하고 있다. 위 그림에서처럼 어떤 루트에서는 플레이어가 (스토리텔러 입장에서) 무의미한 저항을 선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교육용 시청각 자료를 뜬금없이 틀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수 차례 플레이를 지속하다보면 스토리텔러가 진행이 꼬였다며 게임을 재시작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며, 게임 안에 게임 제작 세트들이 구비되어 있기도 하다. 스탠리 우화는 이와 같은 룰 브레이킹을 통해, 이전 게임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렬한 메시지 전달에 성공하고 있다.

"이봐 플레이어! 니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은 너지 더 이상 스탠리가 아니야! 스탠리의 입장을 헤아려보라고! 롤플레잉은 그런 거야!"와 같은 직접적인 메타 게이밍 대사는, 얼마 전 게이머들 사이에서 크게 논란이 됐었던 라스트 오브 어스(Last of us)의 결말씬이 플레이어의 입장과 캐릭터의 입장에서 각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매트릭스 시리즈의 두 번째 편에서 아키텍쳐를 만난 네오가 느끼는 당혹스러움과도 오버랩되기도 한다. 세계관의 매커니즘을 직접 설명해주는 캐릭터라니..!

 

 

0. 마치며..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난 뒤에, 한 사람의 게이머이자 게임 디자이너로서, 항상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고 여기면서 한 켠으로 제쳐두었던 그 질문이 다시금 눈 앞에 던져진 기분이다.

"게임이란 건 뭘까?"

나는 이 질문에서 서두부터 끊임없이 연결지으려 애썼던 매트릭스의 테마가 겹쳐보인다.

"매트릭스란 건 뭐지?(What is the Matrix?)"

모피어스는 매트릭스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 규칙이자 세계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스탠리 우화는 게임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이제는 클리셰에 가까운 짤방인 원사운드 님의 카툰 짤이 다시금 인용될 차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우리가 게임을 하는 진짜 이유.jpg / 출처: TIG 원사운드 님 웹툰 (Link) >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RPG는 ㅇㅇ여야지!" / "RTS는 ㅇㅇ가 생명이야!" / "MMO는 ㅇㅇ가 없으면 안돼!" 와 같은 모든 이야기들을 뭉뚱그려보면, 우리는 말로는 답이 없다고만 했던 게임에 대한 정의를 사실은 "게임은 당연히 ㅇㅇ지"라는 식으로 축약해 재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게임이라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플레이어에게 재미만 주면 그걸로 충분한 모든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스탠리 우화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풀이해보고자 고군분투했으나 전달이 잘 되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는 것 같다.

사실 "(늅늅을 위한) 게임 디자인 분석하기"에도 쓰여있다시피, 가장 좋은 경험은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 경험이다.

그리고 스탠리 우화라는 독특한 게임은, 그 독특함 덕분에 간접 경험만으로 온전히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나의 문장력이 부족한 탓은 굳이 말해 입아플 정도이니 생략하는 것으로 해두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멋진 게임을 직접 해볼 수 있는 스팀 페이지를 공유하도록 하면서, 신성모독에 가까운 무모한 리뷰를 마쳐볼까 한다.

 

The Stanley Parable 스팀 페이지: http://store.steampowered.com/app/221910/

The Stanley Parable 한글 패치: http://st135.tistory.com/150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

아래 포스팅은 GDF에 작성했던 내용을 옮긴 내용입니다.


원문 링크: http://gdf.inven.co.kr/viewtopic.php?f=14&t=340&p=1526#p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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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분량면으로나 내용면으로나 거창한 디자인 매커니즘을 다루는 포스팅은 아니고 상징적인 일반행동구조에 대한 내용을 다뤄보고자 했으니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즘 Vita와 mini Pad에게 포터블 게임 플레이어 자리를 밀린 제 스마트폰이 딱히 구동할 타이틀이 없어지자 가끔 심심풀이 터치터치나 할 겸 확산성 밀리언 아서를 다시 플레이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아주 막 열심히 덱 편집하고 요정도 잡고 이벤트 아이템도 모으고 하는 방식으로는 플레이하지 않지만, 그냥 스테미너가 남아있는 한 양껏 탐색을 한 뒤 맘에 드는 요정이 있으면 배틀 코스트가 허락하는 한 몇 번 싸우고 다시 종료해두는, 그리고 다시 생각날 때 꺼내서 플레이를 반복하는 정도라 아주아주 상당히 라이트하게 플레이하는 중인데요.

이렇게 간간히 가볍게 플레이를 하다보니 덕분에 좀 다른 시각으로 게임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흔히 알려진 "원하는 카드의 수집을 위한 성장"이라는 거시적인 게임 디자인의 순환 구조 이면에 존재하는, 플레이어의 행동 양식에 대한 순환 고리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 순환 고리를 "카드 정리 사이클" 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일단 플레이를 지속하다보면 이벤트 보상이든, 비경 완료 보상이든, 출석체크 보상이든 다양한 경로로 "인연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걸로 잡카드를 왕창 뽑을 수 있겠죠.
그리고 앞서 설명한대로 스테미너가 쌓였으니 소진하기 위해 어느 비경이든 골라잡고 탐색을 합니다. 탐색을 하면 당연하게도 비경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스테이지 별 2 종 씩의 카드를 입수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랜덤하게 출현한 요정까지 쓰러뜨린다면, 더 많은 종류의 카드를 입수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불필요한 잡카드가 잔뜩 뿌려지게 되면 총 카드 보유 한도라는 시스템 상의 제한도 있지만, 메인 카드의 성장을 위해 이 잡카드들을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이 때, 카드를 정리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다른 카드의 강화 재료로 소비시켜버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매각해 골드로 환원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일반적인 루트라면,

1) 카드 성능을 끌어올려 덱을 파워업하기 위해서

또는

2) 기본 최고레벨에 도달하면 변화되는 더 예쁜 일러스트를 보기 위해서

라도 판매 보다는 강화를 먼저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강화는 재료 카드와 함께 게임머니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카드도 정리하고 덱 파워업도 할 겸 강화를 선택하게 되면, 골드 소모가 발생하게 됩니다. 종전의 인연포인트와 마찬가지로 모처에서 입수한 자금으로 어찌저찌 강화를 진행하다보면, 어느 순간 골드가 부족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재료로 없애려던 카드를 팔아서 골드를 충당하기에 이르르죠.

우선 단순히 여기까지의 흐름을 순서대로 파악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1. 탐색
2. 탐색 보상 습득
3. 덱 강화
4. 비용 확보를 위한 매각
5. 다시 탐색

여기서 저는 이 사이클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데요.
하나는 일반적인 "플레이의 성장"이라는 동기에 초점을 둔 "성장 사이클"과, 또 다른 하나의 관점인 "카드의 정리"라는 행동에 초점을 둔 "정리 사이클"의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성장 사이클은 위 순서 중 "3. 덱 강화"를 위해 얻게 되는 파워업이 주요한 동기 요소입니다. 따라서 덱 강화를 위해 계속해서 탐색을 하는 사이클이 완성되는 것이 표면적인 탐색과 강화 컨텐츠의 순환 구조 그림입니다.

하지만 정리 사이클은 3번과 4번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카드의 소비"가 포인트입니다. 이 경우에는 동기에 의한 성장 사이클의 수행에 따라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습관적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장 사이클이 처음과 끝이 완전하게 맞물린 끝나지 않는 나선같은 그림이라면, 정리 사이클은 게임 진행 도중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대처와 같은 형국입니다.

정리 사이클의 관점에서 위의 플레이 흐름을 다시 바라보면 이와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1. 탐색 ~ 2. 탐색 보상 습득: 내 카드가 어질러짐.
3. 덱 강화 ~ 4. 비용 확보를 위한 매각: 어질러진 내 카드들을 정리.
5. 다시 탐색: 반복

게임을 진행하면서 자연적으로 어질러지는 것들을 정리하고, 다시 진행하면서 어질러진 것들을 또다시 정리하고.. 의 행동 패턴 사이클입니다.

이 포럼에 Voosco 님이 전에 올리셨던 "(반쯤 농담인)디아블로의 선과 악"과 유사한 맥락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는데요, 다만 그와 다른 점은 디아블로는 "이미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카오스를 플레이어가 차곡차곡 정리해 나가는 것"인 반면, 밀리언 아서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면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카오스를 진행을 멈추고 정비하는 동안 차곡차곡 정리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PS. 사실 반쯤 써놓고 보니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그만둘까 하다가 어떤식으로든 무언가에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잖아?라는 식으로 어떻게든 계속 써봤지만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orz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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