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실.
한때 논타게팅 MORPG가 봇물터진듯이 발표되던 시즌을 지나, 요즘의 게임계 트렌드는 어느덧 예전 KGC2009에서 Keynote 강연자들이 입을모아 말하던 "가상현실로의 회귀"가 되어버린 것 같다.
당시 강연자는 이렇게 말했다.

"1 세대 온라인 게임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모티브로 현실 세계 이외의 것을 삼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실을 표방한 사회구조와 시스템들이 현실세계의 상식에 맞게 도입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게임 내 모든 시스템들은 현실 구조를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현실과 매우 유사한 세계를 구축해 내는 데에는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세대 이후로는 그러한 이미 만들어진 세계를 기반으로, 그 세계에서 발생한 피드백을 다시 반영한 보다 새롭고 개선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강연자가 소리 높여 주장했던 '가상현실로의 회귀'에 대해 다시한번 짚어보자.
최근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두덕리 온라인의 탄생 배경과 최근 국내 전자회사인 L사의 TV광고를 살펴보면, 사람이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는 이유는 현실을 벗어나 자유를 느끼기 위함이라고 한다.

'현실을 벗어나 자유를 느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상당히 추상적으로 다가오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당연한 것도 같아 차마 공감도 가지 않는다. 그럼 이제부터 찬찬히 문장을 뜯어보도록 하자. 현실을 '벗어나야'하는 이유는, 현재 인간은 현실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임과 동시에 '벗어나 자유를 느낀다'라는 것은 그 '현실 때문에 자유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단하게, 돈이 없어 돈을 벌기 위해 생계형 막노동을 하는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그가 단지 여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노동을 하고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그가 원할 때 그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막노동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일자리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고, 전문 기술도 없어서 "어쩔수없이 필요에 의해" 일을 하는 경우엔 결코 그가 처한 현실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태초부터 능동적이지 못한 수동이자 피동자이며, 자유롭지 못하고, 즐겁지도 않을 것이다.(능동적으로 직업정신을 갖고 즐겁게 일하는 친구는 논외로 하자)

그렇다면, 게임은 어떤가?
우선 클래스(직업)를 고를 때, 본인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 '난 전사는 못하니까 궁수만 할래.' 라거나, '난 스나이핑을 못하니까 어썰트나 해야지' 라는 일이 발생하는가?
물론 잘하고 덜 잘하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할 수 없는 클래스"라는 것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본인이 심사숙고하여 골랐든, 그냥 막연하게 멋져보여서 골랐든, 어떤 클래스를 골랐다고 할 때, 게이머는 플레이 도중 언제라도 관두고 싶을 때 그 클래스를 때려치우고, 새 캐릭터로 새 클래스를 선택해 플레이할 자유가 있다. 따라서 게이머는 능동적이고, 자유롭고, 그로 인해 즐거울 것이다.(설마 이런 자유조차 없는 게임도 있을까? 만약 이런 자유조차 없다면, 그 게임은 이미 게임이 아닌거다)

당신이 지금 어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도중 "어쩔 수 없이 필요에 의해"라는 부분이 발생하는가?
도무지, 아무리, 열심히, 수백번 양보해보려고 생각해도 대체 어느 부분이 나의 의지가 반영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부분이 발생하고 있는가?
이러한 상황들이 발생한다면, 그 게임은 그것에 대해 분명한 '강제'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게임의 궁극적인 가상현실은, 현실과 전혀 개연성이 없을 정도의 전혀 새로운 룰에 의해 "창조"되어야 하고, 반면에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를 분명히 가져야 한다.
위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결국 아래와 같은 논리 구조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현실세계의 인간은 모두 즐거울 수 없다.
2. 하지만 게임세계의 게이머라면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
3. 그러려면 게임세계는 현실세계을 카피하면 안된다.


지금의 많은 온라인 게임들이 그러하듯, 세계관의 모태가 현실세계와 같다면, 앞서 말한 "필요에 의한 수요"가 게임 내에 생길 수 밖에 없고 그러면 결국 그것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일이, 즉 노동이 된다.
노동을 우리는 흔히 무엇이라 부르는가?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노.가.다. 라고 부른다.
바로 그 노가다가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에 근거한다고 필자는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쉽게 예를 들어, "힐러"라는 직업이 있다고 하자. 힐러가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그것이 노동이 아닌 즐거움이겠지만, "아무도 하고싶어하지 않는 힐러인데 없으면 안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은 분명 플레이 자체가 중노동의 고단함과 유사할 것이다.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게임이라는 문화는 인류에게 왜 발생했을까?
게임이라면, 모두가 즐거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게임은 존재하는 것이니까.


만약 그것이 어떠한 패키지 게임이라면, 주인공이 "주인공" 이기 때문에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위해 즐거움을 구사할 각종 장치를 만들어 심어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은? 그 전에, 패키지 게임의 멀티플레이라면? 사람이 다수 일 경우라면, 적어도 "한 무리"라면 그 "한 무리"를 대상으로 즐거움을 부가시킬 수 있지만 그 무리라는 그룹 자체가 둘 이상이 된다면, 둘 다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몹시 불가능한 상황처럼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가령 예를 들어, 스타크래프트로 대전을 하는 A와 B가 있다. 그들의 즐거움은 "이 대결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일 것이다. A와 B가 모두 승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무승부"는 둘 모두의 패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 논리대로, 게임 내에 분명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구도를 당연시 여겨오게 되었다. 그것이 직접경쟁이든, 간접경쟁이든, 그러한 경쟁구도로 몰아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루져는,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산출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스타크래프트의 '승리'와 같은 온라인게임의 즐거움의 목표는 무엇이 있을까?
이 즐거움의 목표는 간단하게 '보상'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 게이머는 어떤 보상을 위해 오늘도 습관적으로 게임세계에 접속하고 있는 것인가?

온라인 게임의 패러다임을 구축한 블리자드사의 패키지게임(패키지 게임이 온라인 게임의 패러다임을 구축했다는 점은 상당한 아이러니와 그 도전의식의 대단함을 동시에 내포하는 것 같다)들을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지금까지의 대다수 한국형 온라인 게임은 맹목적인 레벨업 구도을 고수해왔다. 즉, 레벨업 자체가 보상이자 목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아바타의 성장'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러한 성장의 요소가 애석하게도 "레벨"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디아블로 1을 모태로 제작된 온라인 게임의 구조이자 명백한 한계였다. 따라서 그러한 레벨을 상승시키기 위해 필요한 보상이 "경험치"였고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오는 1차적 보상이다.

그리고 이 구조를 벗어난 것이 디아블로 2를 모태로 구성된, 레벨+스킬+아이템의 성장구조였다. 레벨과 스킬을 하나로 묶어 '캐릭터의 성장'으로 본다면, 캐릭터보다 아이템의 비중이 높아지게 된 것이 바로 이 시기 이후의 게임들이었으며, 이때부터 일정 수준의 레벨을 달성하게 되면(대개는 만렙 달성 시) 레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성능 좋은 "아이템"을 얻는 것이 최대의 보상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반복적으로 특정 아이템을 얻기 위한 사냥인 '아이템 파밍'이 발생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모든 게임의 막연한 카피의 대상이자 그 자신조차 카피의 예술적 경지를 소유하고 계신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이하 '와우')가 되겠지만, 와우의 보상은 경험치와 아이템을 기반으로 그 위에 "돈"을 얹어주고 있는 보상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것이 개발자들에게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와우에서 강해지기 위한 아이템은 "고액 경매"를 통해 입수할 수 있고, 서브캐릭터의 경험치 상승에 도움이 되는 전승아이템도 마찬가지로 "고액의 아이템"이다.

아이템, 경험치, 그리고 돈.

지금까지는 그래왔을지 모르겠지만, 결코 이것이 보상의 전부가 아니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보상은 개발자에게 당장 떠오르는 보상목록일 수 있으며, 게이머에게 당장 떠오르는 보상목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겉모습에 현혹되어 본질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보상은 분명 '무언가를 얻는 것'을 말하지만 그 무언가가 반드시 물질적이라는 전제를 둔 적은 없다. 이것은 단지 물질만능주의에 길들여진 비참한 결과일 뿐. 게다가 더욱 비참한 것은, '유저들이 물질보상만 너무 쫓아가요' 라고 눈물을 짜는 개발자들이 있다면, 그러한 결과는 바로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회사 동료 중 콘솔 게임을 치명적으로 좋아하는 분의 파이널 판타지 7 플레이 시간은, 기록상으로만도 300 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대체 왜? 무엇이 그를 그토록 붙잡아 둔 것일까?
콘솔 게임을 단 한가지라도 즐겨본 사람이라면, "달성"이라는 부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컬렉터들에게 컬렉팅(그것이 물질이 아닐 지라도)을 할 수 있도록 "채워나갈 수 있는 빈자리를 제공한다"는 점이 모든 콘솔 패키지 게임의 공통과업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그 플레이시간 자체도 하나의 달성 목표가 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즐기는 사람의 역량"의 문제인 것이다.

가장 최근에 적용된 와우의 업적 시스템을 살펴보자. 회사 상사 중 많은 사람들이 "그거 하면 뭐줘요?" 라고 물어왔고, "딱히 주는 건 없어요." 라는 대답을 드리자 "그럼 그거 왜해요? 누가해요?" 라는 답변을 주시곤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경험치/아이템/돈과 같은 실질적 보상이 없어도 많은 이들이 업적쟁이를 자처 하고 있지지않은가?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즐거움을 찾는 방법을 모색했고, 그것이 업적의 빈칸, 빈그래프를 채워나가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위해 컨텐츠를 소비해나가는 것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즐거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옛날부터 줄곧 궁금했었다.

대체 왜, 그옛날 유튜브와 같은 공허한 리니지1은 재미있게 했었는데
꽉찬 컨텐츠를 제공하는 와우 카피 게임은 도무지 재미가 없는건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뭘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양키식 RPG인 엘더스크롤과 EVE온라인은 대체 무슨 재미로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열심히 플레이를 하는지?

중요한 건, 결코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가 아니라 "게이머가 주체적으로 목적을 찾을 수 있느냐"라는 부분과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고민해야할 것은,
과연 이 게임은 능동적으로 즐거움을 찾아 게임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수동적으로 물질적 보상을 쫓아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가?

조금 더 나아가서, "능동적으로 즐거움을 찾도록 게이머를 잘 학습시키고 있는가?"
까지가 되겠다.

남들보다 지위가 낮고(레벨이 낮고), 좋은 집도 차도 없고(아이템도 없고), 돈이 없어도(골드가 없어도)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유(게이머가 게임을 즐겁게 지속하게끔 만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히 고민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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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 드래곤라자 양장본 8권 + 그림자 자국 이미지. 필자는 아직 그림자 자국은 구매하지 않았다.
   사진은 네이버 불펌.. >


드래곤라자Dragon Raja.

 이영도씨의 장편 판타지 소설이자, 본인을 환상문학에 처음으로 입문하게 만든 작품 되시겠다.
당시 중학교 1~2학년 쯤이었을 듯한데, 친구 집에서 눈보라Blizzard사의 워크래프트WarCraft 2를
그게 무슨 게임인지도 모르고 넋을 놓고 구경하고나서 막연하게 머릿속에 자리잡았던 판타지 세계.
(나중에야 판타지Fantasy로 분류되는 하나의 장르가 확립되고나서 어린시절 사촌형들이 패미컴으로
즐기던 드래곤퀘스트 류가 모두 이 장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쨋든, "처음으로 접했던 작품이라서" 라기보다, 운이 좋았던건지 처음부터 "제대로 된 작품"을
손에 잡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유피넬(질서의 신. 질서 그 자체를 의미)과 헬카네스(혼돈의 신.
또는 혼돈)로 시작하는 나름의 신학체계(물론 작품의 화자가 17세 소년이라는 설정이므로 깊이있게
다루지는 않는다.)와 마력은 한곳에 집중되기를 거부한다는 나름의 마력체계(이 역시 깊이있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실제 무사가 아닌 다음에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나름의
검술체계까지. 그야말로 일반독자의 수준에서 보았을 때 꽤나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판타지라는 장르를 빌어 유쾌하고 읽기 쉽게 풀어낸,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끊임없이 던져주는
'씹어볼수록 재미있는' 책이다.

 현실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적당히 부패한, 적당히 명예로운 사회와 '인간이 아닌 종족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사회관 역시 작품의 주된 주제인 '관계'를 위해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세워져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라자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볼까?






이영도씨의 다른 글들은 아직 많이 접해보지 않았지만,
(폴라리스 랩소디의 만연체에 거부감이 심하게 들어 그 이후의 작품들도 읽지 않고 있다..)
관계를 이야기하는 드래곤라자와, 시간을 이야기하는 그 후속작인 퓨처워커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WRITTEN BY
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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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성인의 G,

티스토리에서의 첫 발걸음을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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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asion
디자이너의 의도는 플레이어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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